2. 친우회의 기원

친우회(the Society of Friend)의 창시자, 죠지 폭스(George Fox)는 1624년 영국 레스터 주에서 겸손하고 신앙심이 두터운 부모의 아들로 태어났습니다. 진지한 성격의 젊은이로서 성경을 열렬히 탐독했던 사람(그는 성경을 아예 외울 정도였다고 함)이었던 죠지 폭스는, 영국의 내란이 광범위한 지적, 영적 발효를 불러일으키는 시기에 어른으로 성장하였습니다. 폭스 자신의 기질과 당시의 시대 정신은 그를 "찾는 자(seeker)"가 되도록 하였습니다. 즉, 겉으로 볼 때는 하찮을지도 모르는 사건 하나가 계기가 되어 그는 종교적 진리를 추구하기 위하여 길고도 고통스런 길로 나아갔던 것입니다. 직업적 목회자들이나 여러 가지 종파의 교회들이 하나같이 그를 만족시킬 수 없었기 때문에, 그도 다른 영적 지도자들처럼 깊은 의심과 절망의 늪에 빠져들기도 했었습니다.
그의 일기(Journal)에는 그가 엉뚱한 곳에서 찾고 있다가 갑자가 깨닫게 된 사실에 대하여 다음과 같이 적혀있습니다. "그들에 대한, 아니 모든 사람들에 대한 나의 희망 전부가 사라졌습니다. 따라서 밖으로부터는 내게 도움을 줄 것이 아무 것도 없게 되었습니다……, 아! 그때에 나는 '한 분, 오직 예수 그리스도 한 분이 계시다. 그 분만이 네 상태에 대하여 말씀해 주실 것이다'라고 하는 목소리를 들었습니다." 이 몇 마디 안 되는 말로 죠지 폭스는 우리들 한 사람 한 사람의 내면에 빛의 원천이 있으며, 이 빛만이 "어떤 사람이나 책이나 문서 따위의 도움을 빌리지 않고 하나님과 그리스도에 대한 순수한 지식"에 도달할 수 있도록 우리를 이끌어 준다는 사실을 깨달았다고 밝히고 있는 것입니다.
이렇게 해서 "속의 빛(Inward Light)", "씨(Seed)", "모든 사람 속에 있는 하나님의 부분(That of God in every one)" 등으로 다양하게 표현되는 퀘이커의 중심 사상이 생겨났습니다. 이것은 인간 본성을 낙관적으로만 보려는 위험한 견해가 될 수 있다는 평을 받기도 하지만, 그것은 오해입니다. 그것은 본래가 인간의 본성에 관한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본성에 관한 것입니다. 이것으로 인해 하나님은 멀리 계셔서 접근할 수 없는 분이 아니라, 가까이 계셔서 우리들 모두가 쉽게 친해질 수 있는 분이라는 사실이 드러나고 있습니다. 우리가 받아들이기만 한다면, 하나님은 자신의 목적을 위해서 우리를 써 주십니다. 이 세상은 구원받을 수 있고, 또 구원받게 될 것입니다. 그것은 인간 스스로의 능력에 의해서가 아니라 인간의 삶 속에서 드러나는 하나님의 은총에 의하여 이루어지는 것입니다. 이것은 낙관주의의 바탕이 아니라 소망의 근거입니다.
다른 종교지도자들도 죄의 짐으로부터 벗어났던 갑작스런 회심(conversion)의 개인적인 경험을 갖고 있으며, 그 경험의 정확한 날짜까지도 기억합니다. 폭스의 체험도 아주 개인적인 것이기는 하지만, 그들의 것과는 좀 다릅니다. 죠지 폭스는 자기 자신이 영적으로 불충분하다는 느낌은 갖고 있었지만, 그도 무거운 죄짐을 지고 허덕였는지는 분명치 않습니다. 그는 1647년에 일어났다고 믿어지는 그 자신의 깨달음이 정확히 몇 월 몇 일에 일어났는지 밝히지는 못합니다. 왜냐하면 그 깨달음이라는 것이 종교적 진리를 추구하는 영적 작업을 끝맺는 일이 아니라, 하나님과 함께 여행할 수 있다고 확신하면서 지금도 하고 있는 신앙의 여행을 시작하는 일이었기 때문입니다.
폭스는 이러한 퀘이커적 체험을 한 첫 번째 인물이었지만, 그 자신이 친우회의 창시자라는 것은 부정하려 하였습니다. 왜냐하면 친우회의 창시는 그의 업적이 아니고 하나님이 하신 일이기 때문입니다. 그 증거로 죠지 폭스는 자기와 같은 찾는 자들(seekers)이 매우 많이 있다는 사실을 지적했습니다. 그 찾는 자들에게 있어서, 그의 깨달음의 소식은 모순되는 도그마(dogmas)의 횡포로부터의 해방으로 받아들여졌습니다. 이 점은 영국의 서북 지방 사람들에게 있어서 더욱 그러했습니다. 영국의 서북 지방은 폭스가 1652년에 여행한 바 있고 울버스톤(Ulverstone) 가까이 있는 스와쓰모어 홀(Swarthmore Hall)에 본부를 설립할 수 있었던 지역인데, 지금은 컴브리아(Cumbria)주에 해당되는 곳입니다. 퀘이커주의는 바로 이 지역에서부터 시작하여 영국의 방방곡곡과 나아가 영국 국경을 넘어서까지 전파되었습니다. 그것은 폭스뿐만 아니라 일단의 용기 있는 남녀들에 의해서도 퍼져 나갔는데, 그들은 세속적인 지혜에 별로 큰 자부심을 가진 것은 아니지만, 그들 속에 있던 놀라울만한 영적 힘은 하나님의 권능과 인도를 내면에서 찾으라는 폭스의 메시지에 의하여 터져 나왔습니다.
이렇게 해서 탄생된 친우회는 여러 면에서 혁명적이었습니다. 우선 가장 중요한 것은 회원들이 예배를 드리기 위하여 규칙적으로 함께 모인다는 점이었습니다. 1689년 신교자유령(Toleration Act)이 선포되기 전에는 영국국교의 반대자들에게 예배를 드리기 위한 대중적 집회가 허용되지 않았습니다. 그런데 퀘이커들의 경우에 더욱 불리했던 점은 퀘이커들은 교회제도에서 받아들인 기본 방식에 도전하면서, 목사의 인도 없이 모인다는 것이었습니다. 게다가, 초기 친우들은 자기들의 새로운 영적 통찰이 사회적인 의미를 갖고 있다는 사실을 얼른 알아냈습니다. 하나님이 만일 남자와 여자, 부자와 가난한 사람, 친구와 적, 그 어느 누구도 가리지 않고 모든 사람들에게로 언제든지 직접 가까이 갈 수 있게 하는 분이라고 한다면, 인습적인 인간 차별은 부당할 뿐만 아니라 "빛(Light)"을 거부하는 일이 아닐까? 여기에서 그 시대의 계급 차별에 반대했던 초기 친우들의 증언(그들은 그것을 증언(Testimonies)이라고 불렀음)이 나오게 되는데, 그것은 고관들 앞에서 모자 벗기를 거부한 일, 친근한 호칭인 "당신(thee와 thou)"이라는 말을 사람을 가리지 않고 누구에게나 똑같이 사용한 일, 남들에게 자기가 잘 났다고 뽐내려는 겉치장에 반대하여 증거자(witness)로서 검소한 복장을 채택한 일 등입니다. 검소한 생활과 단순하고 꾸밈없는 말은 보다 더 넓은 차원을 열어 줍니다. 친우들은 모든 거래에서 정직의 중요성을 고집했고, 맹세함으로써 진리에 대해 이중적인 기준을 인정하는 일을 거부했습니다. 친우들은 자기들이 추구했던 빛의 인도에 따라 전쟁에 참가할 수 없었는데, 이것은 초창기부터 분명한 일이었습니다.
친우들은 잉글랜드 공화국(Commonwealth / 1649년 찰스 1세(CharlesⅠ)의 처형 후부터 1660년 왕정회복까지의 기간을 말함-역자 주)과 찰스 2세의 재임 기간에 그들의 종교적인 이상과 사회적인 선언 때문에 혹독한 박해를 받을 수밖에 없었습니다. 폭스는 조직적인 박해에는 훈련된 대응책(disciplined response)이 필요하다고 깨달았습니다. 그는 새로운 운동에 피라밋식의 구조를 주었는데, 그 구조란 조그만 마을에 월별모임(Monthly Meeting / 月會), 좀더 큰 지역에 분기별모임(Quarterly Meeting / 四李會), 나아가 한 나라에서는 연도별모임(Yearly Meeting / 年會)으로 모이는 것을 말합니다. 이 모임은 참석할 수 있는 모든 친우들에게 개방되었으며, 친우들이 퀘이커 신앙에 충실할 수 있게 해 주는 일과 감옥에 갇힌 사람들을 도와주는 일에 관심을 기울였습니다. 감옥에 있는 사람들을 위해서 모이는 런던의 정기 집회는 "고난받는 이들을 위한 모임(Meeting for Sufferings)"이라고 불리었는데, 그 모임이 지금은 비록 다른 사람들의 고난에 관심을 쏟고 있기는 하지만, "고난받는 이들을 위한 모임"이라는 명칭은 지금까지도 그대로 사용되고 있습니다.

위로앞으로뒤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