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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교수신문] 김용준 교수의 내가 본 함석헌⑦
  

팔십 高齡에 던진 물음, 무한한 기다림의 삶


무한한 기다림이 선생님의 삶의 전부가 아니었을까 하는 생각을 새삼 하게 된다.

1980년대에 선생님은 매주 화요일 밤에 노자(老子) 강의를 명동 카톨릭 여학생 회관에서 속강하셨다. 후에 다시 언급할 기회가 있겠지만 이 노자 모임은 1988년 5월 10일을 마지막으로 영원히 끝을 맺고 말았다.

그 언젠가 노자 모임에서 선생님은 당신이 처음 미국을 방문하셨을 때 미국의 철학자 호킹(William Earnest Hocking 1873-1966)을 방문하셨던 이야기를 하신 적이 있다.

선생님이 미국을 처음 방문하신 것은 1962년이었다. 군사혁명정부의 서슬이 시퍼런 때였다. 후에 다시 언급하게 되겠지만 ‘5·16을 어떻게 보나’라는 글을 ‘사상계’지에 발표함으로써 미국 국무성의 초청을 받아 미국을 3개월간 시찰하던 때의 이야기다.

내가 알기로는 선생님이 국무성 당국에 소위 ‘필그림 파더즈(Pilgrim Fathers)’라고 불리는 미국 개척사상의 선구자 정신을 이어 받은 개척자 정신(Frontier Spirit)의 철학을 승계하고 있다고 생각되는 철학자를 만나보고 싶다는 뜻을 전함으로써 성사된 만남이었다. 당시 호킹 교수는 90세를 바라보는 노학자였고 미국의 명문 하버드 대학 교수를 30여 년간이나 역임한 대학자였다. 선생님의 전집 12권에 수록되어 있는 ‘그 사람들은 살았더라’라는 글에 의하면 ‘미국의 은둔한 철학자 윌리엄 호킹은 자기의 돌집을 10여 년이나 걸려 몸소 지은 사람’이라고 소개돼 있다.


함석헌과 호킹교수와의 만남

선생님이 호킹 교수를 처음 만났을 때 호킹 교수는 함 선생님께 몇 살이냐고 물었다고 한다. 그래서 60이라고 대답했더니 “You are still young!” 이라고 말했다는 말씀도 기억에 남아있다. 어떻든 하룻밤을 그 집에서 유하고 다음날 작별인사를 나눌 때 “이제 당신은 나의 친구다. 그 까닭은 당신은 이제 나의 비밀을 다 알게 되었으니까”라면서 자기 저서 한 권을 선물로 주었는데 그 책표지 이면에 ‘No Task must be evaded merely because it is impossible. When there is no (personal) vision the people perish.’라는 글이 적혀 있었다는 것이다. 위에서 소개한 선생님의 글에서 이 대목을 선생님은 다음과 같이 서술하고 있다.

<껌 하나를 입에 물어도 뱉기 싫어 질근질근 깨무는데 정권이 맛이 들었는데 그걸 쉽게 놓는단 말이냐? 행동을 하려면 조직이 있어야 된다. 그 조직이란 믿음 곧 신용이다. 서로 덮어주고 감싸주는 신용을 우리는 되찾아야 한다. 내가 미국서 가지고 온 마지막 선물은 이 한마디, “어떠한 일이든지 이것이 불가능하다는 이유를 단순히 피해서는 안 된다”는 것…. 가능과 불가능의 분기점은 바로 목숨이다. 사람은 책임을 지는 동물이다. 되고 안 되고 간에 이젠 ‘하는 것’ 밖에 없다.>

이와 같은 이야기를 소개한 뒤에 선생님은 이제 나도 내 나이 80이 넘었으니 누가 나보고 우리에게 한 마디 말씀을 남기신다면 무슨 말씀을 주시겠습니까 라고 물어온다면 나는 무엇이라고 답을 할 수 있을까? 라고 생각해 보았는데 결론은 ‘기다려라’였다고 말씀하셨던 일을 생생하게 기억하고 있다.

선생님의 팔순기념 강연회 때였다고 생각된다. 선생님에 대한 헌사라고 할까 축사라고 할까 몇몇 사람들의 강연이 끝난 다음에 답사를 겸하여 등단하신 함 선생님은 다음과 같은 말씀으로 당신의 답사를 시작하셨다.

“글쎄요. 이렇게 단에 올라오니 머리 속에 떠오르는 것이 롱펠로우의 ‘삶의 찬가’ 라는 시의 한 구절이군요.”

이렇게 운을 떼시면서 “Trust no future however pleasant/Let the dead past bury its dead/Act, act in the living present/Heart within and God o′er head”라고 영시를 그대로 암송하시는 것이었다.

내가 언제 선생님한테서 롱펠로우(Henry Wadsworth Longfellow)의 ‘삶의 찬가(A Psalm of life)’라는 시를 배웠는지 정확하게 기억할 수 없지만 선생님 하면 이 시를 암송할 정도로 나도 등산할 때 또는 홀로 산책할 때 늘 애송하는 시이다.

언젠가 보스턴을 방문했을 때 시간을 내서 롱펠로우의 무덤을 찾아가 그 앞에서 이 시를 암송했었던 일도 기억에 새롭다. 그런데 이 시의 마지막 연이 다음과 같다. “Let us then be up and doing/with heart for any fate/still achieving, still pursuing/Lean to labour and to wait”

‘여전히 이루면서 여전히 쫓아가면서 수고함과 기다림을 배우자’라는 이 시의 결구가 80이 넘으신 함 선생님께서 우리에게 남기신 유언이었는지도 모르겠다.


장자 선성 편, 내 삶의 좌우명

두 번씩이나 해직을 당하면서 김동길 교수의 유명한 말대로 하루 쉬고 하루 놀고 있을 때 노자 모임에서 또는 기회 있을 때마다 나에게 가르쳐 주신 ‘不當時命而大 窮乎天下則 深根寧極而待 此存身之道也’ 라는 장자 선성(莊子 繕性)편에 있는 글 즉 ‘때를 잘못 만나서 천하에 자기 뜻을 펼 여지가 조금도 없음을 깨달았기에 자기의 생명을 깊이 기르면서 무위의 도를 간직한 채 조용히 때가 오기를 기다리는 것이 명철보신(明哲保身)하는 길’이라는 이 글귀는 지금도 소중히 간직하고 있는 나의 삶의 좌우명이다.

시인의 환희의 소리를 들으면서도 여전히 언젠가는 저 큰 바위 얼굴과 같은 성인(聖人)이 나타나기를 기다리는 호손의 ‘거석상’의 주인공 어니스트의 이야기를 위시해서 ‘고든 장군의 최후’에서 종기가 나면 그 파종할 때를 기다려야 한다는 그 편지의 내용이나 위에서 소개한 지금 나의 머리에 떠오르는 선생님의 하신 말씀이나 기타 여러 사건들에서 나타나 있는 ‘기다림’의 철학이라 할까 또는 기다림의 신학은 함석헌 선생님에게서는 어떠한 의미를 가지고 있는 것인지 다시 한번 생각해 보지 않을 수 없다.

나는 함 선생님의 ‘기다림의 신학’을 ‘새 시대의 종교’(전집 3권에 수록되어 있음)에서 찾아보려 한다. 이 글은 1955년 3월에 중앙신학교 월례강좌에서 행한 강연의 내용이다. 선생님의 글을 따라 그 요점을 추려 보면 다음과 같다.


“때가 오려니와 지금도 그때라”

<모든 종교가 다 이날껏 하나님 앞에서 자기의 절대미를 주장하려고 애걸해 보았다. 그러나 하나님은 절대 허락하지 않았다. 종교란 종교는 다 낡아 버렸다. 참 종교는 완전한 부정 속에서만 있는 것을 가리킨 것이라 할 것이다. 모든 것이 다 그렇지만 종교까지도 부정되어야 종교다. 종교는 구슬이 아니요 씨다. 썩어서 새싹으로 나와 자라서 열매 맺어 퍼져 나가야 할 것이다. 눈을 뜨는 사람은 푸른 연한 잎새를 볼 터이요 이 시대가 달라져 가는 징조를 보면 새 종교가 오리라는 예감을 아니 가질 수 없을 것이다.

미래를 아는 방법은 둘이다. 하나는 계시오 또 하나는 추측이다. 계시는 이지(理智)의 범위를 초월한 것이므로 그 오는 순간까지 사람은 전연 알 수 없다. 계시는 기다릴 것이요 올 때 받을 것이다. 계시가 왔을 때에 그것을 놓침 없이 바로 받으려면 거기 적당한 준비가 있어야 한다. 신앙이란 계시를 받는 준비의 태도라 할 것이다. 유교는 이와 달라 교양을 많이 말하는 것이므로 이 점을 매우 강조한다. 이것은 간단한 말로 표시하면 진인사 대천명(盡人事 待天命)이라 할 것이다.

천명은 곧 계시다. 명은 하나님의 명령 말씀인데 그 명(命)안에 미래가 포함되어 있다. 말씀이 그 뜻대로 풀려 나오면 그것이 역사다. 하나님 편으로 하면 주실 때에 자유로 주시는 것이지만 인간 편으로 하면 올 수 있게 준비가 되어 있어야 온다. 절대에는 시간이 없는 것이기 때문에 완성 미완성도 없고 온다 기다린다도 없다. 그러나 인간 역사는 시간 내에서 되는 것이므로 그 임하는 때가 있고 그 받아지는 시기가 있다. 여기 신앙과 역사적 노력의 관련되는 점이 있다.

그러면 진인사하는 것이 곧 대천명이요 대천명하는 것이 곧 진인사하는 것인데 그 진인사 중의 중요한 하나가 역사이해에 의한 미래의 추측이다. 이것은 어디까지나 인간의 일 곧 이성의 일이다. 이성은 다만 자기 아는 것을 말할 뿐이요 이로써 계시를 받을 준비를 하자는 것이다.

예수는 인류에게 문제를 남기고 가신 이다. 그는 문제를 풀었지만 풂으로써 문제를 새로 주었고 새로 문제를 주는 것이 또 푸는 것이었다. “때가 오려니와 지금도 그때라”하는 것이 그의 문제 푸는 식이요 또 문제 제출하는 식이다. 우리는 그 남기고 간 문제를 받아 가지고 밝기를 기다리며 밤새도록 가지가지의 그림을 그리는 자다. 새 시대의 종교관 그 그림 중의 하나다. 새 종교를 꿈꾸는 것이 곧 새 종교지 그럼 새 시대의 종교의 꿈을 그려보자! 거기 무한이 있다.>

이상의 추려본 함 선생님의 글과 그 행간에서 그의 무한한 기다림의 삶이 무엇이었는지를 나는 이제서야 조금 알 것 같다.
2002-11-01 13:30:4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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