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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교수신문] 김용준 교수의 내가 본 함석헌⑥
  

가슴에 품은 잃어버린 편지

지금 내 수중에 그때 받은 그 편지를 간수하지 못하고 있다는 사실이 이렇게 안타까울 수가 없다. 그 편지가 지금도 눈에 선한데 그 내용을 샅샅이 옮겨 놓지 못하는 것이 못내 아쉬울 뿐이다.

그 편지의 내용은 ‘고든 장군의 최후’를 상세히 기록한 것이었다. 이와 같은 제목의 글은 영국의 전기 작가로서 유명한 스트래치(Giles Lytton Strachey, 1880~1932)에 의한 ‘The End of General Gordon’이라는 영문이 일본인 이도 와다루(伊東彌)라는 분에 의해 편집돼 일본 가이류도 쇼펜(開隆堂 書店)에서 1938년에 발행된 소책자가 있고 일본에서 영문과 일본어로 대역 형식으로 발행된 소책자를 구독한 기억이 있으나 현재는 행방이 묘연해 자세히 소개 못하는 것이 유감스럽다.

고오든 장군이라 함은 1833년 영국 런던 근처의 울리치(Woolwich)에서 태어나 1885년 1월 26일에 남아프리카 수단(Sudan)의 카르툼(Khartoom)이라는 곳에서 전사한 찰스 조지 고든(Charles George Gordon)을 가리키는 약칭이고 그는 당시에 영국에서 ‘차이니스 고든(Chinese Gordon)’이라는 애칭으로도 유명한 당시 영국 사회에서 대단한 위명을 떨친 국가의 영웅이었다. 그의 아버지도 영국군의 육군 중장이었고 그의 어머니는 당시 전 지구를 누비는 대(大)상인의 딸이었다.

이와 같은 가정적 배경으로 그는 울리치 사관학교를 졸업한 후 펨브로크(Pembroke) 요새(要塞) 건설에 종사하도록 명령을 받는다. 이때가 그가 18세가 되는 해였다. 그런데 펨브로크에서 그는 누이 오거스터(Augusta)와 드류(Drew)라는 이름의 신실한 기독교 신자인 상관(육군대위)의 도움으로 기독교에 귀의(歸依)하게 된다. 그는 그때부터 죄에 대해 고민하게 되고 구원에 대한 희망을 갖게 된다. 펨브로크에서 근무하는 동안에 그는 많은 기독교에 관련된 서적을 탐독하게 되고 매주일 성찬에 참여하곤 했다.

1954년에 크리미아(Crimea) 전쟁이 폭발하자마자 그는 공병대에 파송돼 출정하게 되고 많은 전공(戰功)을 세운다. 종전이 되면서 파리강화조약에 의해서 러시아와 터키 국경측정위원회의 영국측 위원이 되어 베사리비아(Bessarabia)에 파송돼 그곳에서 2년을 머문다. 그 임무를 마치고 1860년에 귀국하게 되는데 그 무렵에 소위 아편전쟁의 여파로 다시 영국과 중국 사이에 전쟁이 재발돼 당시 고든 대위는 중국에 파송된다. 그 후 4년간 중국에 머무는 동안에 그의 명성이 널리 퍼지게 된다.

1850년에 중국 관동태생인 홍수전(洪秀全)이라는 사람이 미국 감리교 선교사의 영향으로 기독교인이 되면서 일종의 신비경험을 하게 되고 자기 스스로 예언자를 자처하게 된다. 그 후 그는 자기를 천왕(天王)이라고 호칭하면서 그 세력이 커지고 급기야는 유명한 태평조란(太平朝亂)을 일으키게 된다. 처음에는 기독교를 사칭해 뭉치게 된 반란군이라 서구세력은 호의적이었으나 그 세력이 만만치 않게 불어나고 드디어는 남경(南京)을 점령하고 상해(上海)에 주재하고 있는 서구인들까지도 위협하게 되자 서구인들은 자위혼성군(自衛混成軍)을 조직하게 된다. 그 자위대를 ‘상승군(常勝軍)’이라고 부르게 된다.

그러나 반란군을 진압하는 데는 큰 전과를 거두지 못하게 되자 영국의 정부당국은 반란군 토벌을 결심하게 되면서 당시 30세인 고든에게 이 상승군의 지휘관을 맡기게 된다. 중국 당국으로부터 ‘장군’이라는 칭호가 부여되면서 선천적으로 군인의 기질을 타고난 고든 장군은 그 실력을 마음껏 발휘해 불과 일년 남짓한 동안에 완전히 소위 태평조란을 진압해 버린다.

이와 같은 과정을 거치면서 이미 소개한 바 있는 ‘차이니즈 고든’이라는 애칭으로 영국사회에서 그는 널리 알려지게 된다. 1865년에 그는 상승군 사령관을 사직하고 영국으로 귀국한다. 이렇게 중국에서 혁혁한 공을 세우는 동안에 그는 중국의 이홍장(李鴻章) 장군과의 친교도 돈독하게 맺었고 한편 기독교의 신앙도 점점 깊어가고 있었다. 중국에 머무는 동안 그의 여동생 오거스터와의 서신에서 그의 크리스천으로서의 여러 가지 경험을 섬세하게 밝히고 있다.

귀국 후 그는 그레이브센드(Gravesend) 요새 공사감독에 임명되어 6년간의 평온한 생활을 보낸다. 이 기간에 그는 종교적 사색과 빈민구제활동에 그의 여가의 대부분을 할애한다. 1871년에 파리조약에 따라 유럽 협동 다뉴브 운하개축위원회의 영국측 위원을 맡아 루마니아에 부임해 2년간을 보내고 1872년에 터키의 콘스탄티노플에 가서 뜻하지 않게 이집트의 정치가 누바르 파샤(Nubar Pasha)를 만나게 되고 그로부터 수단 적도지역의 총독직을 맡아줄 것을 종용받고 이를 수락해 1874년에 임지로 향한다.

그 후 약 6년간에 걸쳐 나일강 상류 약 1천5백마일 지역인 중앙아프리카의 습지와 산림을 개척하고 토착민에게 문명의 혜택을 베풀었다. 거의 불모지였던 소위 수단의 적도주(赤道州)는 눈에 보이게 질서와 평화를 되찾게 된다. 군인으로서 타고난 기질을 발휘해 관기(官紀)를 숙정하고 도로와 요새를 구축하며 폭도들을 진압해 그 지역의 번영을 획책(劃策)해 나갔다. 이렇게 불면불휴(不眠不休)의 활동을 3년간 지속한 결과로 그야말로 괄목할만한 발전을 목도할 수 있게 됐다. 그래서 그는 이집트 왕에게 해직해 줄 것을 상소했으나 왕은 이를 받아들이기는커녕 고든 장군을 수단 전체의 총독에 임명하고 만다.

1877년 5월에 신임 총독 고든은 수단의 수도 카르툼(Khartoum)에 도착했다. 그는 바로 개혁에 다시 착수했다. 당시 많은 사병을 고용하고 마치 왕과 같이 행세하고 있었던 노예왕 조비어(Zobeir)의 아들 술리만(Suleiman)이 반란을 일으키자 그는 홀로 수십 마일의 사막을 횡단, 술리만의 진지에 진격하여 일거에 반란을 진압하는 대성과를 거둔다. 그 후 술리만은 도망치고 다시 재기를 도모하지만 그의 부하 게시(Gessi)로 하여금 이를 진압케 하여 노예매매에 일대 타격을 입히게 되지만 그 근절에는 실패한다.

1878년 그는 이집트 왕의 초청에 따라 이집트 재정위원회의 의원으로 위촉되기도 하지만 이스마일(Ismail)왕의 무궤도적 채무의 청산위원회에 불과했다. 그리고 외교적 임무를 띠고 아비시니아(Abyssinia) 지방을 방문하기도 하지만 원래 군인인 고든으로서는 이와 같은 임무는 그에게 적합하지가 않았다. 결국 이스마일 왕의 퇴위를 계기로 그는 수단의 총독직을 사임하고 1879년에 수단을 떠나 영국으로 귀국한다.

그러나 수단 사태는 그렇게 간단치가 않았다. 이집트 왕들의 비정(秕政)의 축적으로 나라의 몰골은 점점 악화 일로를 걷게 된다. 드디어 반란이 속출하게 되고 아라비 파샤 (Arabi Pascha) 및 마하디(Mahdi)의 반란이 점점 그 세력을 더해 가고 있었다. 사태가 점점 악화되자 애급 및 영국 당국도 가만히 보고만 있을 수만은 없게 됐다.

그래서 힉스(Hicks) 대령을 진두로 이들을 진압하기에 이르지만 아라비 파샤가 이끄는 난동은 곧 진압됐지만 마하디의 반란군은 그렇게 간단치가 않았다. 결국 힉스 대령이 이끄는 관군도 마하디 반란군에 전멸당하고 만다. 그리고 동부 수단지역에 파송된 진압군도 반란군의 적장 오스만 디구나(Osman Digna)에 의해 패배하고 만다.

사태가 이렇게 위기에 몰리자 당시의 영국 수상인 글래드스턴(Gladstone)은 이집트를 포기하는 선언을 발표하기에 이른다. 그러나 수단에 주재하고 있었던 이집트인 및 서구인들이 안전하게 철수할 수 있게 하는 일정한 군대의 지휘관이 필요했다. 당시 카이로 주재 영국대사인 에블린 바링(Evelyn Baring) 경의 반대에도 불구하고 들끓는 여론에 밀려 정부는 고든 장군에게 이 대임을 맡기게 된다. 결국 고든 장군은 스튜어트(Stewart) 대령을 대동하여 1854년 2월 18일에 다시 수단의 수도 카르툼에 도착한다.

카르툼에 도착한 고든 장군은 처음에는 개혁적인 선정을 베풂으로써 한때 안정을 되찾는 듯 했으나 마하디 반란군을 과소평가하는 우를 범하고 만다. 결국 카르툼에 갇히는 신세가 된다. 그로부터 317일간을 버티면서 갖가지의 고초를 이겨내다가 결국 구원대의 선발대가 도착하기 이틀 전인 1885년 1월 26일에 적군에게 사로잡히면서 그의 52세의 일생에 종언을 고하게 된다. 글래드스턴 내각은 고든 장군의 전사로 내각을 사퇴하기에 이른다.

이상과 같은 고든 장군의 최후를 상세히 기술한 끝에 함석헌 선생님은 다음과 같이 그 장면을 묘사하고 있었던 것을 확실히 기억하고 있다.

모든 준비를 다 마치고 다가오는 적군이 고든 장군이 주재하는 요새로 도달하게 되면 단추 하나 눌러서 자폭할 수 있게 모든 장치를 마친 상황에서 고든 장군의 머리를 스쳐가는 섬광과 같은 한 줄기의 생각은 장차 하나님이 너를 통해 어떠한 섭리를 베푸실지 아무 것도 모르면서 감히 네 스스로 네 생명을 네 손으로 끊는 오만의 죄를 범하려 하느냐라는 생각에 그는 순순히 식인종인 적군에 끌려가고 말았다는 것이다.

그리고 마지막에 종기가 나면 미리 짜면 덧나고 짤 때 짜지 않으면 곪게 된다는 말씀으로 이 긴 편지를 끝맺고 계셨던 것을 평생 가슴에 간직하면서 살아왔다.
2002-11-01 13:29:4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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