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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교수신문] 김용준 교수의 내가 본 함석헌⑤
  

교사에서 이등병으로…분 참지 못해 편지로 달래

연세대 영문학과 학생이었던 송석중을 놀라게 한 호오손의 ‘거석상’의 줄거리를 여기서 자세히 소개할 필요는 없을 것이다.

함 선생님의 ‘38선을 넘나들어’라는 글 중에 다음과 같은 구절이 있다.

“사람이 아니 오려나? 다리 부러져 업혀 다니며 빈 이름 내잔 입장수가 아니라 두 다리로 땅을 디디고 서면 머리털로 하늘을 가리키는 정말 장수, 정말 영웅 아니 오려나? 한 사람은 아니 오려나? 부릅뜬 눈초리 찢어져 피가 나는 그 따위 장수 말 아니라 ‘나로라’하고 나서면 그 눈에 쏘는 거룩한 인자의 빛에 쏘여 칼과 뭉치를 들었던 무리, 눈 가리고 엎디는 사람 말이지. 그가 맨발로 맨손 들고 가슴 헤치고 38선에 서는 날 민중은 가만 아니 있을 것이다. 한 사람도 빠짐없이 그를 따라 넘지. 그는 우리를 강아지처럼 모가지를 메어 끄는 이가 아니오 당나귀처럼 뒤에서 권총으로 위협해 내모는 이도 아니다. 그 맘의 줄로 우리 맘의 줄을 한데 묶어 앞장을 서는 이지. 그가 나서는 날 우리는 삶, 죽음을 잊고 그를 따라 나설 것이요, 우리가 한꺼번에 38선을 넘으면 누가 감히 막을까.”

함석헌이 번역한 호오손의 ‘거석상’이 그리는 ‘큰 바위 얼굴’은 바로 위의 글에서 말한 ‘한 사람’일 것이다. 작은 마을에서 어려서부터 늙은이가 될 때까지 한결같이 그 마을 사람들이 기다리고 있는 ‘한 사람’ 즉 ‘큰 바위 얼굴’을 기다리며 살아온 ‘어니스트(Ernest)’라는 이름을 가진 한 사람의 일생을 그린 단편 소설에 나타나는 인물들은 ‘개더골드(Gathergold)’로 시작해서 ‘올드 블러드 앤드 선더(Old Blood and Thunder)’, ‘올드 스토니 피즈(Old Stony Phiz)’ 그리고 마지막으론 시인이 차례로 나타난다. 별명 그대로 처음은 상인 즉 돈을 벌어들이는 사람이요, 두 번째는 피와 천둥으로 상징되는 군인이요, 세 번째가 ‘올드 스토니 피즈’라는 별명으로 상징돼 있는 정치인 그리고 마지막으로 등장하는 인물이 시인이다.


“함석헌은 정신적 낭만주의자”

동네 사람은 그때 그때마다 ‘큰 바위 얼굴’이 나타났다고 외쳐대지만 그때마다 어니스트는 조용히 머리를 흔든다. 모든 사람들의 마음을 하나로 묶어주는 저 큰 바위 얼굴의 인자한 모습을 찾지 못했던 것이다. 평생을 그 ‘큰 바위 얼굴’이 굽어보고 있는 조그마한 마을에서 성실하게 살아온 어니스트는 급기야는 시인에 의해 바로 당신이야 말로 저 ‘큰 바위 얼굴’의 화신이라는 찬사를 듣게 되지만 어니스트 자신은 동네 사람들에게 연설을 끝마치고 단을 내려오면서 여전히 보다 더 훌륭한 저 큰 바위 얼굴과 같은 사람이 나타나기를 기다린다. 바로 어니스트의 이와 같은 모습이야말로 함 선생님이 그런 ‘그 사람’이었는지도 모른다.

“온 세상의 찬성보다도 ‘아니’하고 가만히 머리 흔들 그 한 얼굴 생각에 알뜰한 유혹을 물리치게 되는 그 사람을 그대는 가졌는가?”

함 선생님의 유일한 시집 ‘水平線 넘어’라는 시집에 실려 있는 ‘그 사람을 가졌는가’라는 시의 마지막 연(聯)이다. 함 선생님께서 이 강연을 마치시고 돌아가신 후에 나에게 직접 보내주신(1953년 4월 27일) 시집 서문의 다음 구절을 나는 잊지를 못한다.

“의사를 배우려다 그만두고 미술을 뜻하다가 말고 교육을 하려다가 교육자가 못되고 농사를 하려다가 농부가 못되고 역사를 연구했으면 하다가 역사책을 내던지고 성경을 연구하자 하면서 성경을 들고만 있으면서 집에선 아비노릇 못하고 나가선 국민노릇 못하고 학자도 못되고 기술자도 못되고 사상가도 못되고 어부라면서 고기를 한 마리도 잡지 못하는 사람이 시를 써서 시가 될 리가 없다. 이것은 시 아닌 시다.”

선생님과 이렇게 첫 대면을 한 후의 어느 날 새벽에 나는 집에서 멀지 않은 월봉산이라는 산정에 올라 선생님께 편지를 썼다. 지금 나는 그때 무슨 내용의 글을 썼는지 기억하지 못한다. 또 선생님께서 수없이 주신 편지를 내딴에는 잘 둔다고 둔 것 같은데 언제 어떻게 없어졌는지 그저 안타깝기만 하다. 그러나 분명히 기억하는 것은 선생님께서 나에게 첫 번째 주신 편지에는 ‘김 형에게. 나에게 기쁜 소식을 전하는 그대는 나의 친구’라는 글귀로 시작돼 있었던 사실이다. 그 편지를 받아들고 나는 얼마나 놀래고 얼마나 감격했는지 모른다. 어떻게 아들 뻘인 나에게 ‘김 형’이라는 호칭을 쓰셨을까? 그리고 그 첫 구절이야 말로 어떤 유명한 한 시의 첫 부르짖음과 같은 감격을 나는 금할 수 가 없었다. 송석중 교수가 소개한대로 그는 분명히 피가 흐르고 있는 낭만주의자였다. 나는 지금도 함석헌을 ‘정신적 낭만주의자(Spiritual Romanticist)’라고 서슴없이 부르고 있다.

내 기억으로는 함 선생님은 다시 한번 천안농고를 방문하셨고 두 번째 강연에서는 ‘사별삼일 괄목상대(士別三日 刮目相對)’라는 말씀과 ‘일일부독서구중생형극(一日 不讀書 口中生荊棘)’이라는 안중근 의사의 말씀을 해주셨던 것으로 기억하고 있다. 선비들이 작별한지 사흘이 지나면 서로 눈을 부비고 상대할 만큼 달라져 있다는 고사를 말씀하신 것으로 미뤄 두 번째 방문은 첫 번째 방문에서 별로 오래지 않은 때였다고 추측이 된다. 사흘이라는 말이 나오니 안중근 의사의 하루라도 책을 읽지 않으면 입안에 가시가 돋는다는 말씀으로 이어진 것이 아닌가 생각된다.


수업 끝난 교무실서 소집영장 받아

그 무렵에 나에게 큰 사건이 벌어진다. 어느 날 나는 수업을 끝마치고 교무실에 출석부를 꽂으려고 들렀더니 그곳에 가끔 시내에서 마주치던 천안경찰서 병사계 주임이 서 있었다. 별로 친한 사이도 아니어서 목례로 끝내고 돌아서려는데 병사계 주임이 나에게 다가오더니 작은 백지를 내밀었다. 펼쳐보니 공무원 소집 영장이었다. 무슨 영문인지 알 수가 없었다. 어떻든 결과적으로 그 길로 병사계 주임인 이 형사에게 끌려 경찰서로 연행됐다. 그리고 논산 신병훈련소로 이송됐다. 도대체 어불성설이었다. 수업을 끝내고 교무실로 들어선 교사에게 불쑥 종이 한 장 내밀고 마치 도망친 죄수 끌고 가듯이 여러 학생들 보는 앞에서 경찰서로 연행되는 몰골이란 참을 수 없는 인격모독이 아니고 무엇이란 말인가. 분이 머리끝까지 치밀었으나 별 수 없이 간수에게 끌려가는 죄수 꼴이 되고 말았다. 며칠 전에 공무원 소집령이 내려와 부득불 취한 조처라는 것이었다. 자유당 말기의 행정의 난맥상의 단적인 하나의 예가 아닐 수 없다.

이미 소개한 바와 같이 정식 군인은 아니었으나 미군 종군통역으로 백병전을 방불케 하는 서부전선 최전방에서 전투에 참여해 말을 과장하자면 구사일생으로 살아남은 경력을 갖추고 있었다. 그리고 연령으로 보아 징집대상도 아니었다. 그런데 교사부족으로 어려움을 겪고 있는 지방의 고등학교 교사를 공무원 소집령이라는 듣지도 보지도 못한 행정령 때문에 논산 신병훈련소에 개끌려 가듯 입대 당하고 마는 당시의 사태를 나는 지금도 도대체가 납득할 수가 없는 것이다. 논산훈련소 안에서 끌려간지 한 달만에 공무원 소집령은 폐지됐다는 신문보도를 보고 나는 부들부들 떨 정도로 분노에 차 있었다.


애증 교차하는, 지울 수 없는 삶의 체험

여기서 나의 신병훈련 생활 그 후에 의병 제대로 칠팔 개월 후에 다시 천안농고로 복직하게 되는 과정을 상세히 서술할 필요는 없을 것이다. 그러나 당시에 어이없이 끌려가 채 일년이 못 되는 군인생활 특히 이등병이라는 졸병이 겪어야 할 웃지 못 할 갖가지의 사건들, 지금은 상상할 수도 없는 마치 포로수용소와 같았던 당시의 논산 신병훈련소 안에서의 잊혀지지 않는 갖가지의 추억들, 그리고 6·25 사변 휴전직전의 후방 육군병원 병실생활을 통해서 하룻밤 지나면 한 명 두 명씩 같은 병실에 누워 있었던 전사들이 죽어가는 상황에서 경험하게 되는 하루하루의 심리적 갈등 등등은 이제 80을 바라보는 이 시점에서 회고해 보아도 나의 일생을 통해서 지워 버릴 수 없는 너무나 귀한 삶의 체험이었다는 사실을 고백하지 않을 수 없다.

만약 나의 평생에 일년이 채 못 되는 이 군인생활이 없었더라면 표면적으로는 별 일 없었던 것처럼 흘러간 짧은 몇 개월간이었겠지만 그러나 내 마음 속에 새겨져 있는 이 몇 달 동안의 삶의 자국은 다른 어떤 것과도 바꿀 수 없는 너무나 소중한 인생 경험이었다고 말하지 않을 수 없다.

어떻든 당시의 나는 부글부글 끓어오르는 분을 참지 못하는 와중에서 함 선생님께 편지를 썼다. 지금 그 내용을 기억할 수는 없지만 당시의 나의 상황으로 보아 불문가지의 내용이 아니었겠는가. 선생님께 편지를 써 올렸다는 사실도 잊을 정도로 하루하루 피곤하게 훈련받고 있을 때 두툼한 흰 봉투의 선생님의 답장이 날라 왔다. 종이가 부족했던 당시에 타이프라이터 용지 십여 매에 예의 선생님의 늠름한 글씨가 그득히 차 있는 편지가 나에게 전달됐던 것이다. 우선 나는 편지의 분량에 놀라지 않을 수 없었다.
2002-11-01 13:29: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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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갑균 김용준박사님, 저는 1966년 고대화공과에잠시조교를했습니다.교수님글을감명깊이읽었습니다.그리고 김도성의 아들이기도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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