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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교수신문] 김용준 교수의 내가 본 함석헌④
  

“좁은 화학실에서의 再會, 평생 잊을 수 없어”

천안농업고등학교에서 보낸 채 3년이 못되는 기간의 나의 삶은 나의 일생을 지배한 귀한 시기였다고 서슴없이 말할 수 있을 것 같다. 지금 생각해 보아도 참 열심히 살았던 시절이었다는 생각이 든다.

어떻든 천안읍 광제의원이라는 병원집 맏아들이었고 전시하라고는 하나 당장 학교에서 받는 월급은 그저 나의 용돈으로 충당해도 별 지장이 없는 터였다. 일제하에서는 충청도는 감리교구였기 때문에 천안에는 장로교회는 없었다. 그래서 해방되기 전까지는 감리교회를 다녔었다. 그러나 해방이 되면서 천안에도 장로교회가 생겼다. 아버님이 중심이 되어 처음에는 조그마한 방에서 시작한 장로교회는 지금 천안시 중앙에 우뚝 서있는 천안중앙장로교회로 발전했다.

초대 개척 목사님이셨던 인광식 목사님은 과학자의 길을 포기하려던 나에게 앞으로는 과학자 크리스챤이 필요한 시대가 반드시 올 것이니 과학의 길을 포기하지 말라는 귀한 충고를 해주신 분이다. 내가 지금도 화학자로 남아있는 것은 이 목사님 덕분이다. 그 충고가 없었더라면 아마도 화학자 김용준은 없었을 것이다. 당시 나는 천안 중앙장로교회의 젊은 집사였다.


천안농고 시절, 젊은 날의 귀한 시간

천안농고의 화학교사인 나에게 현관문 옆에 자리잡고 있는 수위실이 화학 준비실이라는 명목으로 나에게 할당된 것을 나는 지금도 감사하고 있다. 그 좁은 공간에서 나는 나의 젊음을 불사를 수 있었다고나 할까. 여러 선생님들의 공동 집무실이었던 교무실에는 나의 책상은 없었다. 나는 이 화학준비실에 출근하였고 수업시간을 제외하고는 이 준비실에서 독서를 즐길 수 있었다. 후에 대법관을 역임하셨고 현재 새문안교회 원로 장로님이신 방순원 변호사님과 같이 일주일에 한번씩 타임지를 읽어 나갔던 일은 지금도 잊을 수 없는 즐거운 기억으로 남아 있다.

새벽 일찍 일어나서 나는 병원의 환자 대합실에서 찾아오는 몇몇 학생들에게 영어성경을 가르치는 일로 하루를 시작했다. 낮에는 학교에 출근하였고 방과 후에는 교회에서 또 영어를 가르쳤다. 학교에서도 화학만을 가르친 것이 아니었다. 논증기하 심지어 독일어까지 가르쳤다. 지금도 당시의 학생들과 어쩌다 만나면 나를 화학선생보다는 영어선생으로 알고 있는 사람들이 적지 않다.

독일어에 관해서는 웃지 못 할 일화가 있다. 어느 날 교감이 부른다기에 교감선생한테 갔더니 곧바로 하는 소리가 내일부터 독일어를 가르치라는 것이었다. 처음 만났을 때와 마찬가지로 뒤 칠판을 가리키며 이미 시간을 배당하였다는 것이다. 청천벽력이 아닐 수 없었다. 완강히 항의하였지만 허사였다.

초등학교 일년 후배인 의대생이 독일어를 가르치고 있었는데 대학에서 호출령이 떨어져 가버렸다는 것이다. 한 시간 가르치기 위하여 몇 시간씩 예습해가면서 독일어를 가르치느라고 땀 뺐던 일이 지금은 고마운 추억으로 남아 있다. 지금 생각하면 부끄러워 말하기조차 민망한 일이지만 당시 타교생까지를 가르치고 있었던 지방 고등학교의 실정이 이러했다.

한편 교회에서는 성려회(聖麗會)라는 중고생들의 모임을 지도했으며 한때는 모여든 학생들이 2백 명을 육박할 정도였다. 그리고 이미 잠깐 언급했지만 학교서 타는 월급은 일부 집사람에게 주고 나머지는 어려운 학생들에게 나누어 주었다. 물론 과외비가 있을 리가 없었다. 나는 요즈음 장학금이라하여 학생들에게 다소의 금전혜택을 베푸는 일에 대하여 회의심을 가지고 있다. 당시로서는 무슨 다른 생각이 있어서 돈을 나누어주었던 것은 아니고 그저 어려운 학생들을 돕는다는 소박한 생각이었는데 후에 알게 된 이야기지만 거짓말을 해가며 나에게서 돈을 타 가는 학생이 생기는 것을 보고 그 뒤로는 찔끔찔끔 베푸는 일은 학생들에게 결코 도움이 되지 않는다고 생각하게 되었다. 나는 지금도 거리의 걸인들에게도 돈을 주지 않는다.

어떻든 나의 영어 공부반에 나와서 공부하던 학생들이 열 명 가까이 서울대학교에 입학하게 되자 나는 꽤 유명한 교사가 돼버렸다. 그때나 지금이나 고등학교는 좋은 대학에 몇 명이나 합격시키느냐가 학교고 교사고 간에 평가의 잣대가 되고 있는 것은 다름이 없었다.

정신없이 한해가 흘렀고 천안농업고등학교 교장선생님이 경질되었다. 이종건 교장 선생님이 예산농업고등학교로 영전하시고 김두혁 선생님이 새로 교장선생님으로 부임하셨다. 이종건 교장선생님은 항상 단정한 선비풍을 간직하고 계신 전형적 교장선생님의 풍모를 지니신 분이었다. 이종건 선생님에 비하면 새로 오신 김두혁 선생님은 어딘가 피로색이 감도는 좀 흐트러진 모습으로 다가오는 인상을 지금도 기억하고 있다. 가족을 데리고 오지 않으신 채 교장관사에 혼자 계셨다.


양복입고 넥타이 맨 모습 처음 뵈

평교사인 내게는 교장선생님이 경질되었다는 사실은 그렇게 실감이 오는 것은 아니었다. 교감선생님은 계속 계셨으니 나로서는 전과 별 다름없이 내 생활에 여념이 없이 지내고 있었던 어느 날, 내 비좁은 화학준비실에 교장선생님이 들르셨다. 전에 없었던 일이었다. 긴장하며 일어서서 교장 선생님을 맞이하였는데 들릴까 말까한 음성으로 함석헌 선생님이 며칠 후에 이 학교를 방문하시게 되었다는 전언을 남기고 돌아 가셨다. 지금껏 김두혁 교장 선생님이 내가 함 선생님을 흠모하고 있는지를 어떻게 알고 나에게 그와 같은 말을 하셨는지 나는 알지를 못한다. 그저 YMCA강당 뒷좌석에서 말씀만 들었을 뿐 감히 선생님을 직접 찾아 뵐 생각은 꿈에도 해보지 못한 채 6·25를 맞이한 처지였다.

며칠 후 나의 좁은 화학 준비실에 들어오신 함 선생님을 직접 뵈었을 때 좀 과장된 표현일지 모르나 나의 심장이 얼어붙는 느낌이었다. 그때의 감격은 지금도 생생하게 기억하고 있다. 선생님이 양복을 입으시고 넥타이를 매신 모습을 본 것은 나의 평생에 그때 딱 한 번뿐이었다. 가족이 없이 혼자 지내시는 교장관사에 함 선생님이 유하실 수 있는 침구가 마땅치 않았다. 그래서 나의 영어 공부반에 나오던 학생들을 동원해서 침구를 집에서 교장관사까지 나르느라고 법석을 떨던 일이 기억난다. 교장관사에서 여장을 푸신 함 선생님은 어느새 한복으로 갈아입고 계셨다.

천명 가까운 전교생이 들어앉은 강당 교단 위에 서신 선생님은 YMCA 강단에 서 계시던 그 모습이었다. 그날 선생님께서 학생들에게 들려주신 말씀의 내용은 호손(Nathaniel Hawthorne, 1804~1864)의 ‘큰바위 얼굴(Great Stone Face)’이라는 단편 소설이었다. 우리나라에서는 ‘주홍글씨’의 작가로 더 많이 알려져 있는 호손은 선생님이 평생 애송하시던 ‘인생찬가(A psalm of life)’의 작가 롱펠로우(Henry Wadsworth Longfellow, 1807~1882)와도 친교를 나누었던 미국의 손꼽히는 작가라는 사실은 널리 알려져 있다.

고 송석중 교수(미국 미시간 주립대학 언어학과 명예교수)가 나에게 보내준 글에 호손에 관한 귀한 이야기가 기록되어 있다. 1947년 3월에 남하하여 오류동 송두용 선생 댁에서 유하고 계실 때 함 선생님은 당시 연세대 영문학과 학생이었던 송두용 선생의 장남인 송석중 군과 때로 영시에 관하여 이야기를 나누시던 일이 있었던 것 같다. ‘어려서부터 멀리서 아버지 친구로 그를 바라보아 왔으나 직접 얘기를 하게 된 것은 바로 이때부터다’라고 송 교수는 당시를 회고한다. 그의 글을 그대로 옮겨보자.


호오손과 영시(英詩), 그리고 낭만주의의 정신

“1948년 봄 학기에 ‘19세기 영시’라는 강의를 맡고 워즈워스(Wordsworth) 감상에 정열을 기울이던 김도성이 우연히도 오산출신으로 함석헌의 제자이었다는 것이 계기가 되어 화제가 영문학으로 돌아가 영국의 시인과 작가에 대해 토론을 벌이게 되었다. 석중은 함석헌이 영어로 독서를 한다는 것은 알고 있었으나 그가 영국시인에 대해 그렇게 자세히 알고 있다는데 경이를 느끼게 되었다.

워즈워스뿐만 아니라 셸리, 바이런, 브라우닝 등 19세기의 낭만주의 시인들을 즐겨 읽었다는 이야기와 또 ‘나는 낭만주의자이지, 별 수 없어’라는 그 자신의 고백을 듣게 되었다. 그는 미국 소설가 호손의 단편 ‘큰바위 얼굴(The Great Stone Face)’을 번역해 석중에게 보여주며 읽어보라고 했다. ‘호손은 참 문장가야’하고 감탄하는 소리를 듣고 석중은 그의 영어 실력에 경의를 표하게 되었다. 영문학을 전공한다는 그는 칼라일의 ‘영웅숭배’를 무척 힘들여 독파한 경험이 있어, 문장의 맛을 안다는 얘기는 까마득한 꿈나라의 이야기같이 들렸다. 엄격한 아버지 밑에서 자라난 석중은 허물없이 대화의 상대가 되어 문학과 독서에 대해 이야기를 주고받고 할 수 있는 아버지의 친구 함석헌이 고마웠다. 석중이 가끔 찾아가면 함석헌은 새로 쓴 시를 읽어주고 해설까지 겸하니 그것은 무척 즐거운 시간이 되었다.”
2002-11-01 13:27:3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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