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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김정연 [ E-mail ]
  아버지는 아들에게 꿈을 물려줬습니다.
  

2002년 12월 19일 새벽이었습니다. 정몽준씨의 지지 철회가 있은 지, 정확히 세 시간 후였습니다. 다 이긴 선거가 다시 승부를 알 수 없는 원점으로 돌아갔던 시점이었습니다. 그때 저는 노무현 라디오를 듣고 있었지요. 노무현 라디오에는 마침 문성근씨 명계남씨가 나와 있었습니다. 문성근씨와 명계남씨는 울고 있었습니다. 서로 흐느끼면서 명계남씨가 문성근씨에게 반복해서 말했습니다.

"성근아, 왜 오늘 따라 문익환 목사님이 보고 싶냐?"

아버지는 아들에게 꿈을 물려줬습니다.

그 이야기를 들으면서, 저는 묘한 생각이 떠올랐습니다. 이건 아버지와 아들의 이야기구나. 높은 현실의 장벽에 부딪혀 실패한 이상주의자 아버지와 그의 아버지의 못 다한 과제를 해결하려는 아들의 이야기. 그리고 이 아버지와 아들의 이야기는 문성근씨와 문익환 목사님 뿐만 아니라, 노무현 당선자와 그의 아버지, 유시민 씨와 그의 아버지 그리고 김원웅 의원과 그의 아버지 사이에도 되풀이되고 있다는 것을 깨달았습니다. 이번 대선은 아버지와 아들 세대간의 대결이 아니라, 아버지와 아들 세대가 함께 이룬 승리였던 것입니다.

프로이트는 아버지와 아들의 관계를 설명하기 위해서 오이디푸스 신화를 가지고 왔습니다. 그것은 어머니를 가운데 두고 아들과 아버지의 투쟁을 다루는 신화입니다. 아이들에게 어머니는 그들이 자라는 환경이기 때문에 어머니는 상징적으로 세계 그 자체를 의미합니다. 따라서 어머니를 사이에 둔 아버지와 아들의 투쟁은 상징적으로는 세계의 지배권을 놓고 다투는 권력 투쟁일 수밖에 없습니다.

프로이트에 따르면, 아들은 아버지와 이런 투쟁에서 패배하기 마련이고 언젠가 자신이 커서 또 다른 어머니 (결국 아내가 되겠지요)를 차지 할 수 있다는 희망 아래 아버지를 이상화하고 그를 동일시하게 됩니다. 결국 아들은 자신도 모르게 자신이 투쟁했던 바로 그 폭군을 닮아가게 됩니다.

사실 수많은 아들들은 이러한 패턴을 따라갔습니다. 그리고 어느 순간 자신이 그토록 증오했던 아버지의 모습을 하고 있는 자신을 발견합니다. 이회창 후보는 이러한 길을 따라갔던 사람입니다. 아래 글은 동아일보에 기고되었던 신용구씨의 칼럼 중 일부입니다.

"부모가 나들이할 때는 대개 한살이라도 더 어린 아이를 데리고 다니는 게 상례인데 그(이회창)의 모친은 네 살배기인 그에게 혼자 집을 보게 하고 그보다 공부를 잘하는 형과 손위 누이를 데리고 친정에 다녀오곤 했다고 한다. 자신에 비해 형을 편애하는 듯한 어머니의 태도에 소외감을 느꼈을 것이다. 일곱 살 적에 군말 없이 어머니의 쌀 심부름을 하는 의젓한 행동은 어머니의 인정과 사랑을 받기 위한 형제간 경쟁심의 발로로 이해된다. 부친은 훨씬 부담스러운 존재였다. 이 후보의 부친은 엄했을 뿐 아니라 공직자의 청빈을 무섭게 강조한 사람이었다. 이 후보를 둘러싼 남자들은 막강한 경쟁력을 갖춘 강한 남자들로 그가 쉽게 뛰어넘을 수 없는 존재들이었다. 이 후보가 받았을 정신적 중압감을 어느 정도 짐작할 수 있다. 부담스러운 경쟁적 관계가 빚는 갈등과 자신의 무력감을 극복해 나가는 과정에서 이 후보는 완벽을 추구하는 강박적인 성격의 소유자로 성장하게된 것 같다."

이회창 후보는 형제 중에서도 어머니의 관심을 받지 못한 아이였습니다. 솔직히 어머니의 총애를 받지 못했던 그는 어머니의 사랑을 놓고 감히 아버지와 경쟁을 시도할 수 없었을 겁니다. 덕분에 그의 아버지에 대한 이상화와 동일시는 일찍부터 시작되었으며 남들보다 철저하게 이루어집니다. 그는 경기 중학교 시절, 수학 시험성적이 나쁘게 나오자 부모의 기대를 충족시킬 수 없다는 절망감에 빠져 가출을 시도합니다. 그가 부모의 관심을 얻을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은 부모가 원하는 성취를 이루는 것이었습니다. 아마도 소년시절 이회창 후보는 부모가 원하는 성취를 이루지 못한다면 버려질 지 모른다는 불안감을 가지고 있었을 겁니다. 결국 그는 유기 불안을 극복하기 위해 자기 자신이 되기 보다 아버지가 원하는 그 사람이 되려고 합니다.

그런 점에서 그가 형제 중 유일하게 아버지와 같은 직업을 선택했다는 사실을 눈 여겨 볼 필요가 있었습니다. 이회창 후보는 아버지가 못 이룬 사회적 성공을 이룸으로써 아버지의 관심을 받으려고 했고 이홍규 옹은 그런 아들을 통해서 자신이 가져보지 못한 권력의 핵심에 다가서려고 했던 것입니다. 아들과 아버지의 이러한 밀착 관계는 이회창 후보가 40살이 넘어서도 아버지의 종아리를 맞았다는 일화에서도 엿볼 수 있습니다. 아버지는 40이 넘어 이제 아내와 아이들을 가진 아들을 독립된 존재로 보지 못했던 것입니다. 아버지는 40이 넘은 아들을 여전히 자신의 꿈을 실현시켜 줄 대리자로 보고 있었고 그 대리자가 자신의 뜻에 벗어나면 언제고 처벌할 수 있다고 생각했던 것이지요.

그러나 프로이트의 오이디푸스 신화가 모든 아들과 아버지의 관계를 설명해주는 것은 아닙니다. 아버지와 아들의 관계를 보여주는 또 하나의 신화가 있습니다. 그것은 상처받은 아버지를 회복시키는 아들의 신화입니다. 성배의 기사 퍼시벌은 여행중 한 성에 들어갑니다. 그 성에 는 치유되지 않은 상처를 입은 어부왕이 살고 있습니다. 퍼시발은 쓸데없는 질문은 하지 않는다는 기사도에 따라 어부왕에게 어디가 아프냐고 묻지 않았습니다. 그 때문에 어부왕은 상처를 치유할 기회를 잃고 어부왕의 성은 허공 중으로 사라집니다. 퍼시발은 뒤늦게 후회를 했지만 이미 때는 늦었습니다. 그후 그는 사라진 어부왕의 성을 찾아 긴 여행을 합니다. 결국 그는 그 성을 다시 찾고 다시 어부왕 앞에 섭니다. 그리고 어부왕에게 어디가 아프냐고 묻습니다. 퍼시발은 질문은 어부왕을 치료합니다. 그리고 그는 어부왕이 자신의 아버지임을 알게 됩니다.

알 수 없는 병으로 고통 받는 아버지와 아버지의 상처의 원인을 묻고 그 상처를 치유할 방법을 찾아내는 아들의 신화는 노무현 당선자, 김원웅 의원, 문성근씨, 유시민씨에게서 되풀이 됩니다. 그들 모두는 상처받은 아버지의 아들이었고 그들의 인생은 아버지의 상처를 치유하는 긴 여정이었기 때문입니다. 아래의 인용은 '희망 혹은 상식'에서 유시민씨가 노무현 당선자를 인터뷰한 부분을 발췌한 것입니다.

유시민 : 부모님한테서 받은 것이다. 이렇게 말할 수 있는 게 있습니까?
노무현 : 받은 것이 있지요. 타협을 하지 않는 성격은 아버지한테 받았습니다.
유시민 : 그렇게 배웠다는 이야기인가요, 아니면 타고나기를 그렇게 타고났다는 말씀인가요?
노무현 : 타고나기를 그렇게 타고난 것이 아닌가 싶어요. 아버지가 타협을 잘 못하셨어요. 별로 큰일은 없었지만 타협을 잘 안하셨어요.
유시민 : 어른 시절에 선친께서 타협하지 않은 모습을 보신 걸 기억하십니까?
노무현 : 그렇지만 이러면 자꾸 우리 어머니가 나쁜 사람이 되는 데(웃음)... 어느 가정이나 다 그렇잖아요? 우리 아버지가 어머니한테 구박을 참 많이 받았어요. 이유는 소위 일상 생활에서 권모술수를 쓸 줄 모른다는 것이죠. 우리 어머니는 '너무 용맹이 없다', 이렇게 표현하셨는 데, 이를테면 손해보는 거래 같은 걸 자주 하셨던가 봅니다. 아버지가 남 소송하는 데 증인을 서러 많이 다니셨어요. 소송의 당사자는 이해 당사자지만 증인은 이해관계가 없는 사람이거든요. 그런데 협박과 회유를 무릎 쓰고 온 마을에서 다 아는 일인데도 아무도 증언을 안 하는 일을 유독 아버지 혼자만 증언을 한다고 생각해보세요. 얼마나 모난 사람인지(웃음). 증언을 해서 아버지가 증언을 해준 쪽이 이겼어요. 말하자면 소송에서 약자가 이긴 거죠. 마름 출신의 지주와 소작인이 토지 분배를 놓고 분쟁을 했는데 결국은 소작인 쪽이 이겼죠. 그런데 다 끝난 뒤에 마을의 몇 가지를 정리하면서 우리 아버지를 따돌리고 자기들끼리 화해를 하였어요. 원수는 아버지만 남았죠. 그 일로 우리 어머니가 항상 아버지를 비난했어요.
유시민 : 어머니께서 동네에서 생활하시기가 불편하셨다는 점도 있었겠네요.
노무현 : 그렇지요. 그런 일로 해서 어머니가 가장 억울해하는 것은 봐라 그 사람들은 배신했지 않냐, 결국. 그러니 양심껏 살아서는 안된다고 자주 저를 교육했죠. 득 되지 않는 일에 나서지 말라는 거죠. 아버지가 그런 일에 나섰다고 해서 어리석은 사람이라고 했어요. 실제로 그일 때문에 지주 아들들한테 아버지가 몰매를 맞아서 두루마기에 피가 벌겋게 묻어서 집으로 들어오시고 했던 것을 제가 봤어요.
유시민 : 노고문께서는 그런 모습을 보면서도 선친께서 잘못된 일을 하셨다고 생각하시지는 않은 것 같습니다. 지금 말씀하시는 것을 보면.
노무현 : 말은 못했지만 어머니를 원망스럽게 생각했죠. 어머니하고 다툴만한 나이는 안됐고 하지만 아버지는 충분히 이해했죠.

어린 노무현의 눈에는 옳은 일은 한 아버지가 왜 마을에서 따돌림을 당하고 어머니의 비난을 받으며 지주의 아들들의 몰매를 맞았는지 이상했을 겁니다. 훗날 변호사가 되어 부림 사건을 맡았을 때, 그는 금서를 읽었다는 이유만으로 만신창이로 맞고 공포에 질려있는 대학생들의 모습 속에서 어린 시절 아버지의 모습을 보았을 겁니다. 왜 옳은 일을 한 이들이 구속되며 감금되며 고문당해야 하는가? 그는 학생들의 처참한 모습을 통해, 핍박 받는 노동자들의 모습을 통해, 그 옛날 옳은 일을 하고도 고통 받았던 아버지의 상처가 어디서 비롯되었는지 묻지 않을 수 없었을 겁니다. 그는 아버지를 모르는 척 할 수 없었듯이, 사회적 약자들을 모른 척 할 수 없었을 겁니다. 인권 변호사로서 또는 정치가로서의 그의 경력은 그렇게 해서 시작됩니다.

대선 막바지, 철새들이 몰려오는 한나라 당을 떠나 과감하게 개혁당으로 간 김원웅 의원도 노무현 당선자와 비슷한 기억을 가지고 있습니다. 아래 이야기는 그가 TV 찬조 연설에 나와 한 이야기입니다.

"제 집안 이야기를 하나 하겠습니다. 제 선친은 광복군 간부였던 김근수 지사이고, 제 모친은 독립유공자 포상을 받으신 전월선 지사입니다. 제가 어릴 때 우리집은 아버지의 독립군 동지들이 모이는 장소였습니다. 하루는 아버지의 독립군 동지들이 선배독립군이 돌아가셔서 상가에 들렀다가 우리집에 모였습니다. 그런데 아버지 친구들이 밤새도록 통음을 하며 엉엉 우시는 것이었습니다. 그 돌아가신 선배 광복군께서 임종시 가족들을 모아놓고 이런 유언을 했답니다. 앞으로 우리 가문은 절대 독립운동을 하지 말아라. 일본놈이 밀고 들어오면 친일파가 되고, 미국이나 중국이 쳐들어오면 그 앞잡이가 되라. 그래야 자손들이 번창한다고요. 어깨 너머로 이 말을 들은 소년 김원웅은 우리 현실에 얼마나 분개했는지 모릅니다."

그는 또 말합니다. 독립군이었던 아버지를 울린 그 친일파들이 해방 이후 반공만 외치면서 애국자로 둔갑했고, 이승만 독재에 빌붙고, 군사독재에 빌붙고, 지역주의에 빌붙어 지금까지도 기득권을 지키고 있다고. 그래서 그는 한나라당에 머물 수 없었다고 말합니다.

"제 눈에도 한나라당에 머물러 있으면 힘도 생기고, 돈도 생기고 양지를 걸어갈 수 있을 거라는 게 보였습니다. 아마 그 때문에 자민련에서, 민주당에서 철새정치인이란 오명을 뒤집어 쓰고도 사람들이 모이는 이유일 것입니다. 그러나 그럴수록 저는 이게 아닌데, 이게 아닌데 하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한나라당은 제가 머물 곳이 아니라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떠나야 할 때라고 생각했습니다."

김원웅 의원은 그것이 아무리 보장된 길이라도 친일파의 후예인 한나라당과 함께 할 수는 없었을 겁니다. 그것은 아버지를 두 번 울리는 일이었기 때문입니다.

여기 바르고 원칙대로 살았기 때문에 고통 당했던 아버지에 대해 이야기하는 또 다른 아들이 있습니다. 아래 인용은 유시민 씨가 쓴 [서른 살 사내의 자화상]에 나오는 이야기입니다.

"나(유시민)는 아버지의 월급이 얼마인지를 고3이 되어서야 처음으로 알았다. 그전에는 누구도 말해주지 않았기 때문이다. 해방 직후부터 교직에 몸담았던 아버지는 이미 30년 가까이 교편생활을 한 노교사였다. 그런데 당시 아버지가 경주에 있는 미션 계통의 사립고등학교에서 받은 봉급은 대학을 갓 졸업한 교사의 초임과 같았다. 이것은 크나큰 충격이었다. 나는 그 이유에 대해 누이들에게 꼬치꼬치 캐묻지 않고는 참을 수가 없었다. 결론은 간단했다. 썩어빠진 교육계의 풍토 때문이었다.

몰락한 양반의 후예. 소작농이나 다름없는 빈궁한 어린 시절. 소학교 졸업 후 농사일에 매인 가운데 검정고시로 중학교 졸업 자격 획득. 영양실조로 인한 한쪽 눈의 실명. 일본으로 건너가 병원 간호보조원으로 일하면서 전문학교 수료. 해방. 태평양전쟁 당시의 식량부족 속에서 얻은 만성적인 위장병. 맨손의 귀국. 그리고 역사교사로 교직생활 시작.

나의 아버지는 이토록 험한 인생역정을 거쳤음에도 불구하고 보기 힘든 이상주의자였다. 학교에서 아이들을 가르치고 집에서 쉴새없이 독서하며 무언가 쓰는 것에 이외에는 다른 취미가 없었다. 소심한 성품이라 친구도 별로 없었다. 자식들을 아들 딸 구별 않고 키웠고 가장의 권위를 내세우지 않았다. 이런 성품 때문에 당신은 소위'운동'이란 것을, 말하자면 인사 청탁 같은 것을 전혀 하지 않았던 모양이다.

그래서 교감 승진 자격을 얻고도 무려 10년째 되던 해에야 겨우 승진 발령을 받았는데, 그것도 경북 청송 골짜기의 교사 3명뿐인 분교장이었다. 하지만 이것은 사실상 교직을 떠나라는 선고나 다름없었다. 버스에서 내려서 20리길을 걸어야 하는 벽지 근무를 감당하기에는 건강이 허락치 않았던 것이다. 게다가 늘어난 빚의 무게 때문에 밤이면 불면증에 시달리기 까지 하였다.

아버지는 사표를 내고 퇴직으로 빚을 갚았지만 이젠 직장을 잃어버린 셈이다. 웬만한 교장선생과 맞먹는 높은 호봉의 노교사를 받아들일 만큼 어리숙한 사립학교는 어디에도 없었기 때문이다. 결국 경주시에 있는 모 고등학교에서 교사 초임만 받는 조건으로 다시 교편을 잡았다. 어머니가 장사일에 나서지 않으면 안되었던 이유도, 아버지가 한푼이라도 아끼기 위해 객지에서 손수 밥을 지어야 했던 것도 다 이 때문이었다. 나는 이 사실을 고3이 된 후에야 비로소 알게 되었던 것이다.

대부분의 사람들이 그러하듯 나도 아버지를 무척 훌륭한 분이라고 생각했다. 한글을 깨우쳐주고 손수 구구단을 가르쳐준 아버지, 여섯살 때부터 아버지에게서 받아 읽은 그 수많은 책들, 늘 독서하는 모습, 나는 아버지를 존경할 충분한 근거를 가지고 있었다. 적어도 내가 그때까지 가르침을 받은 어느 역사선생님보다 아버지는 역사에 대해 훨씬 해박한 지식을 가진 분이었다. 제자들이 잘못을 저지를 때 잘못 가르친 때문이라고 스스로 자기의 종아리를 때리는 선생님을 나는 본 적이 없다. 내가 아는 아버지는 훌륭한 선생님이자 자상한 아버지였다. 그런데 그러한 분이 좀 고지식하고 융통성이 없고 권모술수를 모른다는 이유로 냉대 받고 소외당한다는 것이 내 가슴속에서 분노를 불러일으켰다. 단지 봉급의 많고 적음이 문제가 아니라, 25년여 교직생활에서 쌓은 아버지의 연륜과 풍모가 가차없이 짓밟히고 있다는 데서 나는 내 자신의 인격과 존엄성이 짓밟히는 것과 똑같은 아픔을 느꼈다. 그리고 그 이후 나의 의식 한귀퉁이에서 정신적 반란의 싹이 트기 시작했다."

그후 유시민씨는 출세가 보장되어 있지만 독재자에 편에는 서는 삶과 고통스럽지만 약한 자의 편에 선 삶 사이에서 고민합니다. 그는 이렇게 말합니다.

"(하숙비 아끼기 위해) 밥을 손수 짓는 늙은 아버지, 편찮은 몸을 이끌고 시장을 다니는 어머니. 내가 으레껏 법대에 진학하여 사법고시를 보리라고 기대하는 일가친척들. 매일 열 시간 이상 일하고서 2만 5천 원의 월급을 받아쥐는 야학의 어린 여성 노동자들. 유신 독재의 횡포에 비분강개했던 그 수많은 불면의 밤들. 법복을 입은 중년의 나. 붉은 오랏줄에 묶여 법정에 선 나의 모습. 감옥의 높은 담장. 내 앞에는 두 개의 길이 열려 있었다. 타협과 투쟁, 출세의 탄탄대로와 투옥의 가시밭길, 평화롭고 안일한 미래와 쫓기고 고난받는 미래, 이 두 갈래길 앞에서 나는 번민했다."

그리고 그는 고난받은 미래를 선택합니다. 이상주의자였던 아버지, 술수를 몰라 언제나 피해를 보지만 그래도 소신을 지킨 아버지 반대편에 서서 사리사욕을 채우고 자신의 영달만을 꿈꿀 수 없었기 때문입니다.

자, 이제 이 글 처음에 등장했던 문성근씨에 대해서 이야기해볼까 합니다. 왜 그가 노무현을 지지했는지, 그에게 이번 대선이 어떤 의미였는지, 투표일 새벽에 흘린 그의 눈물이 무엇을 의미하는지. 아래의 인용은 그가 쓴 "인간 김대중, 문익환 그리고 노무현"에 나오는 내용입니다.

"송구스럽고 또 주저되지만 얘기를 문익환 목사에서 시작하는 것을 용서해 주셨으면 합니다. 솔직히 저는 제 아버지 문익환 목사를 잘 모릅니다. 저는 그분 살아 생전에, 그리고 돌아가신 후에도 그분이 도대체 어떤 분인지에 대해서 감히 생각해본 적이 없었습니다. 제 부족한 머리와 좁은 가슴으로는 도저히 알아낼 수 없는 차원에 계셨기 때문입니다.

문목사의 삶 중에서도 제가 특히 감당이 안 되었던 부분은 이것입니다. 문목사는 1976년 59세에 처음 구속된 이래 94년 77세로 돌아가실 때까지 생애 마지막 17년 중에서 11년 반을 교도소에서! 살았다는 겁니다. 5년 반을 밖에 있었고 11년 반을 교도소 안에 있었습니다. 아시다시피 정치범에게는 난방을 해주지 않습니다. 아침에 일어나 보면 물이 10cm, 15cm씩 얼어 있습니다. 그런 방에 70살 넘은 노인네가 담요 몇 장만 가지고, 맨몸으로 버티는 겁니다.

"내가 이 말을 하면 또 들어가지", "내가 이런 행동을 하면 또 들어가지" 이런 걸 뻔히 알면서 도대체가 6번씩이나 감옥에 들어가는 사람이 어디 있느냐는 말입니다. 제가 어떻게 그걸 이해할 수 있었겠습니까?

그런데 최근, 『문익환평전』을 쓰고 있는 김형수 시인을 만났더니 눈이 번쩍 뜨이는, 정말 귀가 번쩍 뜨이는 설명을 해주었습니다. 김형수씨가 저한테도 뭘 물어보겠다고 왔길래 대뜸 "나 문목이 누군지 모르겠어" 그랬더니 이렇게 설명을 해주더군요.

문익환 집안은 1905년도에 일제가 한반도를 강점해 갈 때 만주로 건너갑니다. 윤동주 시인 집안, 김약연 집안 해서 5가문이 만주로 넘어갑니다. 이 집안들이 모두 한 식구입니다. 그러니까 여기에는 일본놈 첩자가 들어올 수 없습니다. 따라서 자연히 해방구가 되었지요. 안중근 의사가 저희 집에 묵으시며 뒷동산에서 총연습을 하셨다니까요. 문 목사는 여기서 몸으로 민족주의를 받아들입니다. 그런데, 해방 후에 남북한 정권이 만들어지는 걸 보니까, 이것은 완전히 민족주의의 패배입니다.

그래서 문 목사는 당분간 접어두고 공부만 합니다. 그러면서 1968년부터 처음 잡혀가던 1976년까지 8년 동안 구약성경 번역을 합니다. 구약학자로서, 또 종교인으로서 문 목사에게는 영광이었죠. 그리고 필생의 사업이었습니다. "이거 마치면 죽어도 좋다"고 할만큼. 그리고 번역이 정리되어 가던 1976년부터 사회활동을 시작합니다.

그런데 그 구약성경이 무엇입니까? 그 안엔 수많은 선지자의 삶이 기록되어 있습니다. 그러니까 1976년도에 나올 때 문익환은 성경에 나와 있는 선지자들의 삶을 수없이 "따라 살겠다"고 연습을 했던 것이 아니었을까 하는 것이지요.

이 선지자들이 무엇을 하는 사람들이었습니까? 고통받는 민중들에게 비전을 제시하면서 "자, 가자!" 이렇게 외치고 곧바로 위정자들에게 잡혀 죽는 게 선지자들이었습니다. 그 선지자들의 삶을 따라 살겠다는데 그에게 공권력이 눈앞에 보였겠습니까?

"자, 우리 민족의 갈 길이 무엇이냐? 그 길을! 향해서 가자!" 그대로 전진하는 것이지요. 그러다가 공권력이 잡아들이면 구속되는 거구, 풀어 주면 나왔다? 다시 "자! 죽으러 가자!" 외치면 또 들어가고....그래서 6번을 그렇게 아무렇지 않은 듯 구속되었던 것이 아니냐. 이게 그의 삶이었다….

이런 설명을 듣는 순간, 이해가 되었습니다. 인간 문익환에게는 감옥을 넘어 죽음을 넘어 바라보는 것이 있었습니다. 그것은 민족의 비전이고 '희망'이었습니다."

아버지의 꿈을 이룬 아들은 다시 제자리로 돌아갑니다.

문성근씨는 40이 훨씬 넘어 자신의 아버지를 발견합니다. 그리고 아버지의 염원을 이해하게 됩니다. 문익환 목사님은 비록 자신의 뜻이 이 땅에서 이루어지는 것을 보지 못하고 돌아가셨지만, 중년이 되어서 아버지를 이해하게 된 아들은 아버지를 결코 실패한 이상주의자, 세상을 잘못 만난 선지자로 만들 순 없었을 겁니다. 그는 결국 아버지가 못다한 꿈을 이루기 위해, 순탄했던 방송일을 접고 정치판으로 나옵니다. 그는 아버지처럼 방방곡곡을 돌아다니며 외칩니다. 그리고 아버지의 못다한 꿈을 이루어줄 한 정치인을 대통령으로 만들려고 합니다.

그러던 중 선거 마지막 날 정몽준 의원이 갑작스러운 지지철회선언을 합니다. 문성근씨는 당황할 수밖에 없었습니다. 그것은 다 이겨놓은 선거를 물거품으로 돌릴 요인이었기 때문입니다. 이번 대선에서 지는 것이 단순히 그가 지지했던 후보의 패배만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었던 까닭입니다. 그것은 아버지의 꿈을 헛된 것으로 만드는 것이었고 그 꿈을 위해 헌신했던 아버지의 삶 자체를 부정되는 것이었기 때문입니다. 이번 대선 패배는 문성근씨에게 있어서 노무현의 패배가 아니라 바로 아버지의 패배였던 것입니다.

그러나 다행히도 혹은 당연히도 소신과 원칙 때문에 고통 당하고 핍박받았던 아버지의 상처는 아들들에 의해 치유되었습니다. 아들은 아버지가 못다 이룬 꿈을 실현했습니다. 아들들은 그렇게 아버지의 고통이 부질없었던 것이 아니라는 사실을 증명했습니다.

수구 세력들은 이번 대선을 세대간의 대립으로 봅니다. 그들은 이번 대선의 승리를 아버지 세대에 대한 자식 세대의 반역으로 몰아 미묘하게 자식 세대에게 살부의 죄의식을 씌우고 있습니다. 그러나 이번 대선은 아버지에 대한 아들이 반역이 아니라, 아버지의 못다한 꿈을 아들이 현실 속에서 이룬 쾌거였습니다.

노무현 당선자와 김원웅 의원, 유시민씨와 문성근씨는 이 선거를 통해 자신의 아버지를 의인에 반열에 올려놓았습니다. 아들들 덕분에 아버지는 더 이상 세상 물정 모르는 순진한 이상주의자가 아니라 더 나은 세상을 만들기 위해 헌신했던 의인으로 인정받게 되었습니다. 그렇게 아버지와 아들들은 한 가지 진리를 우리에게 몸으로 보여주었던 셈입니다.

"의에 주리고 목마른 자는 복이 있나니 저희가 배부름을 얻을 것이다." (마태 5:6)
2003-01-14 14:32:4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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