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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선생님! 글 좀 하나 부탁합니다."
"무슨 글을..."
"어떤 내용도 좋습니다."
"그럼 하나 써볼게요."

아뿔싸! 편집책임을 맡고있는 이 선생의 청탁을 쉽게 수락한 것이 문제였다. 처음엔 할 말이 많이 쌓여있어서 뭐든지 쓸 것 같았다. 헌데 날이 지날수록 좀 막막하고 초조해지기 시작했다. '잘 써야 분회보 지가가 좀 올라갈텐데...' 라는 생각이 앞서서인지, 아니면 '고료가 없는 원고'라서 그런지, 하여튼 글이 잘 안나가니 답답한 노릇이다. 사실 IMF사태 이전엔 외부 원고로 용돈도 제법 쏠쏠했었는데...(ㅠ.ㅠ)

잡념이 떠오른다. 잡념을 지워야지. 아니, 지우지 말자. 지금은 그것도 아쉬우니. 사상이나 사건보다 사람에 대해 말하기는 참으로 쉬운 일이다. 우리같은 사람들은 흔히 남들의 허물이나 과오를 나와 이해관계가 있던 없던 간에 한 접시의 안주 감으로 삼아 버리곤 한다. 그러나 자기의 실수나 어리석음은 여간해서 잘 인정하지 않는 것이 보통이다. 자존심이 허락하지를 않는다. 게다가 더 분명한 이유가 있다. 스스로 속내를 드러내려면 상당한 용기를 담보로 잡혀야 하는데 그게 어디 쉬운 일인가. 이런 면에서 볼 때 맞아죽을 각오로 참회록을 써 내려간 저 루소나 간디는 참으로 시사하는 바가 크다고 하겠다. 얘기가 나온 김에 나도 만용을 부려 속내를 조금만 드러내보자.

동양 윤리사상을 공부하던 시간이다. 아이들에게 '義의 철학자' 맹자를 목청 돋구어 설명하면서, '왕이 폭정을 하면 왕도 갈아 치워야지.' 이게 맹자의 혁명 사상이야. 서양 윤리사상 시간이다. 허위에 당당하게 맞서서 진리에 대한 소신을 추호도 굽히지 않는 소크라테스. 독배를 받아 마시는 그의 의연한 모습을 진한 감동으로 그려본다. 크리스트교 윤리를 지날 때는 체포 전후의 예수와 베드로의 긴장된 풍경들을 애써 그려주곤 한다. 예수와 조폭의 차이가 무엇이냐고 묻고는 반응을 본다. 잠시 뜸을 들이면서 심각한 표정을 지어본다. 체포되는 와중에도 예수는 베드로를 꾸짖고 있다. "칼쓰는 자는 모두 칼로 망해." 교실분위기가 잘 나가면 현행 윤리 교과서에 등장하지 않는 갈릴레이와 부르노를 불러 생사의 대결을 시켜 보기도 한다. 내친 김에 '유토피아'를 꿈꾸던 토마스 모어의 숙연한 죽음까지도. 헌데 가르치기만 잘하면 뭘 하나. 난 그런 위인이 못되면서.

진실과 허위! 힘든 길과 쉬운 길. 두 갈래의 길이 시인 프로스트를 잠시 생각나게 한다. 또 안중근과 이완용이 오버랩 되어 나타났다가 사라진다. 진실을 향한 열정과 투쟁의 삶이 아쉬운 세상이다. 값진 승리를 거둔 이들의 전기를 통해 얼마간 용기와 위로를 얻어 낼 수는 있었지만, 지난날 나 자신도 의지의 부족으로 말미암아 두 길 앞에 맞닥뜨려서 적당히 타협을 해버리기 일쑤였다. 나는 지천명의 나이가 되도록 먹고 마시는 일보다는 책을 사고 읽는데 더 큰 가치를 두고 살아왔다. 그러나 타고난 그릇이 작아서 아직 뭐하나 제대로 이룩한 것이 없다. 다만 의롭지 않은 일에 가까이 다가가지는 않았다. 윗사람에게 아부해본 적이 없다. 목이 좋은 곳을 탐하지도 않았다. 그래서 그런지 교직생활 20년 동안 부장 교사조차 한번 못해 보았다. 물론 능력부족이 더 큰 이유이겠지만. 다행히도 평생 평교사로 살겠다는 소신은 지켜질 것 같다.

언젠가 잘 마시지도 못하는 술기운을 빌어 간부 선생님들에게 외람 되게 인생강의를 했으니, 쯧쯧 경솔하기 그지없는 짓이었지. 담배끊은 걸 무슨 벼슬한 양, 복도 귀퉁이에서 흡연하고 있는 동료들을 안타깝게 바라보는 나르시스적인 태도는 어찌할꼬. 나이 쬐금 먹었다고 젊은 후배선생들을 향해 시대의식과 정의감이 없다고 탄식하는 나는 도대체 뭐란 말인가. 장자와 예수의 지혜를 운운하는 내가 여전히 편견과 독선으로 가득 차 있으니 말이다.
교정을 오가며 스치는 선생님들의 표정을 읽어보면 교직에 관한 한 다들 일가가 있어 보이는데, 나만 홀로 작아지는 느낌이 드는 건 왜 일까. 돌이켜보면 위선과 허세로 얼룩져버린 나의 부끄러운 교직생활에서 찾을 수 있을 것이다. '창백한 지성'은 우리가 살아가는 세상에 그다지 도움이 안되나 보다.
























































2003-01-07 17:02: 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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