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배모임의 뜻

 


- 함 석 헌 -
『퀘이커서울모임월보』, 16, 1984년 8월.

 

 


 하워드 브린튼 선생이 『퀘이커 300년』에서 미래의 종교에 대해 말한 것이 있습니다. 퀘이커가 꼭 미래에 합당한 종교라고 그렇게 말할 수는 없지만, 앞으로 세상이 차차 달라져가는데 거기에 만약 미래 종교가 있다면 지금 퀘이커의 걸어가는 그런 노선 비슷한 것 아니겠는가 그런 의미의 말을 했지요. 그건 대단히 중요한 말인데, 무슨 의미로 그랬나 생각해본다면 이렇게 생각할 수 있지 않을까?


 퀘이커는 신비주의와 상식주의를 둘 다 경험해 가지고 있습니다. 현대 종교에서 문제되는 것의 하나는 신비주의입니다. 퀘이커 발생 초기에는 신비주의가 상당히 강했다면 강했던 듯합니다. 영국 서북방 농민들이 타락한 국교의 모양을 보고, 자기네의 종교적 양심에 만족될 수 없음을 보고 자기네 비슷비슷한 사람끼리 모임을 같이하게 되면서부터 시작됐는데, 그 300년사(史)에 하워드 브린튼 선생이 그 모양을 묘사하면서 이런 말을 했습니다. 한 7,8명 되는 사람들이 이 집 저 집에서 모여서 기도를 하는데, 어떤 땐 아주 이상한 소릴 하는 사람들과 감격해서 눈물을 흘리는 사람들도 있었다고 했습니다. 그건 그때 초기 기록들을 보고 하는 말 같은데, 예를 들면 이런 이야기가 있습니다. 거기 어떤 늙은 부인이 갑자기 “불이야, 불이야” 그래서 모두들 놀라고 있노라니까 “지옥 속에 있는 그 불” 그랬다는 것입니다. 얼핏 들으면 “저 사람은 뭐 정신나간 사람인가?” 그럴 것입니다. 그 사람들로서는 아마 명상을 하다가 감격해서 불, 불, 지옥 속의 저 불 그랬겠지요. 들여다본게 있어서 그랬겠지만 다른 사람은 그 지경을 알 리가 없지요.


 거기서 문제되는 건 그럼 지옥이 땅 밑에 정말 있단 말이냐 하는 것입니다. 지금은 아무리 열심히 믿는 사람 중에라도 땅 속에 들어가면 지옥이 있다고 믿을 사람은 없을 거요. 아주 단순하게 믿는 사람이 더러 있을는지 몰라도. 그러나 적어도 옛날엔 일반 사람들은 지옥이라는게 땅 속에 들어가면 있다고 그러고, 더구나 그걸 『신곡』으로 유명한 단테가 7층 지옥이라고 했기 때문에 땅 속에 들어가면 정말 그런 데가 있는 줄로 믿었습니다. 지금은 학문이 발달하고 그랬지만 옛날에는 사람이 모두 단순했고 물리적 지식도 없었으니까, 번개가 하나님의 눈빛이라든지 우뢰소리로 하나님이 노했다든지 그렇게 신화적으로 말을 했지요. 그러나 지금 우리는 그런 걸 그렇게 믿진 않아요.  


 그 말은 옳은 말이에요. 그렇지만 거기서도 우리가 주의할 거는, 그 사람들도 번갯불인 줄 알지 모르는 것 아닌데, 그러면서도 그때 사람이 그런 것은, 저것은 하나님의 눈빛이라든지 하나님의 노한 음성이라든지 한 것은 현실 자연계를 그렇게 믿었다는 것보다도, 그걸 보고 정말 하나님이 노하셨나 하는 그 깊은 속은, 하나님이라고 하는 속의 차원은 우리 현실 세계가 아니니까 형용할 수가 없는 건데, 그때 과학은 배운 것이 없고, 자연 현상은 살아있는 걸로 우리와 아주 밀접한 관계가 있는 그런 살림 속에서 살아가고 있던 사람으로서 그렇게 뵈는 건 당연한 일이란 말이에요.

 그런데 지금은 그렇지 않아요. 그럴 필요도 없고 그래서는 안되지요. 하지만 그럼 하나님이라고 하는 자리가 있어서 우리 이성을 초월해서 계시다는 것을, 세상의 모든 일이 어째 그런지, 어는 무엇으로 그렇게 되는지, 개인의 노력만으로도 나라의 힘으로도 안되고 세계의 사람들이 들러붙어서도 안되고, 사실 일이란 사람의 힘으로 과학으로 미리 예측했다가 아는 것도 아니고, 인력으로 제지할 수 있는 것도 아니지만, 그런 것이 있다는 건 부인할 수 없는데, 그런 걸 어디 자기의 과학지식이 모르는 바라 해서 없는 걸로 여길 수가 있겠나.


 그러니까 정신계라고 하는 그 차원은 어떤 과학자라도 그가 정직만 하다면 그걸 없다고 할 수는 없단 말이에요.


 그러면 신비 역시 없달 수는 없지요. 그런데 신비를 지금은 과학에 의해서 이게 단 줄로 아니까 그렇지요. 그래서 신비라고 그러면 미신처럼 알아요. 그때에 번개를 그렇게 보고 우뢰를 그렇게 들었던 것을 지금은 미신이라고 그래도 좋지요.


 그럼 신비가 없단 말이냐? 이성으로 모든 걸 다 안단 말이냐? 모든 사건의 원인은 사람의 조사한 걸로 다 설명이 되며, 일의 결과는 그럼 사람의 예측으로 다 알 수 있단 말이냐? 그게 안될 것은 뻔한 일, 그런데 어떻게 감히 신비가 없다고 그럴 수 있나. 지금의 인류를 가지고도 알 수 없는 점이 있는 것만은 사실이란 말이오. 알 수 없는 점을 설명은 못하지만 우리 마음속에 그걸 뭣으로든지 느끼긴 느끼니까 인정을 안할 수 없단 말이에요. 그걸 인정 안하는 사람은 현실에 있는 제 욕심을 채우려고 장난을 하는 데 방해가 되니까 “에이 그까짓 게 있긴 뭣이 있단 말이야” 그러는 것뿐이지, 어디 그 사람이 그런다고 그게 없어지느냐 그 말이오.


 그래 그런 면은, 그 하워드 브린튼이 서양에서 난 종교 중에서 가장 동양적인 것을 가진 종교다 그랬는데, 무슨 영향을 받았다든지 하는 증거는 내가 아는 한에는 없지만, 그렇지만 하여간 비슷하게 동양적인 그런 게 있는 것은 사실이요. 신비를 인정하는 거지요. 그런데 다른 한편에선 어떤고 하니, 근대 사람은 현실적으로 이렇게 봐서 설명이 되는 거를 진리로 믿지 설명 안되는 건 진리가 아니다 그래요. 그건 현상계에 있어서는 옳은 말이에요.


 그런데 믿는다고 하면서도 그것까지를 그렇지 않고도 될 수가 있다든지, 기도함으로써 죽은 사람이 살아날 수 있다든지 그러는 걸 그대로 믿는 건 또 미신이라고 그래야지, 그걸 아니라고 고집하면 되느냐 말이오.


 내가 아는 사람도, 그전에도 얘기했지만, 뻔히 사람이 죽었는데 자기는 믿는다고, 그것도 처음 믿는 여잔데, 오래 믿은 이도 아니고 그런 여잔데 기도하면 된다고 해서, 시체가 자꾸 썩어 냄새가 나는데 나흘 동안을 붙잡고 낫는다고 그러고 고집을 하다가 마지막에 사람들이 막 시체를 잡아 끌어내고 그래서 그만뒀다는 얘기가 있어요. 그거는 정말 어리석은 일이란 말이에요. 그거는 뭐 신비도 아니고 은혜도 아니고 성령도 아니고 그래요.    


 그런 일을 보니까 종교는 미신이다, 그걸로 인해서 괜히 무식한 사람이 세력있는 놈에게 잡히어가지고 밤낮 종살이만 한다 그렇게 유물론자들이 반대하는데, 그건 당연한 일이에요. 그러니까 그런데서 해방이 되어야 해요.

 그런 면에서 퀘이커는 그건 걸 뭐 꼭 가리러들지 않아요. 가령 예수가 처녀에게서 태어났다, 처녀에게서 태어났다는 게 역사적 사실이냐? 역사적 사실이라고 ―뭐 아니라고까지 말할 자격도 없지만― 난 반드시 그걸 역사적인 사실로 믿어야만 된다고 그러진 않아요.


 왜 그런고 하니, 그런 말이 나온 까닭이 있긴 있겠지요. 있긴 있어요. 그것이 반드시 요셉과는 관계가 없이 저 혼자만 나았다든지 뭐 그런 가능성이 전혀 없다고 지금 과학을 가지고 딱 잘라서 말할 수는 없지만, 대개는 성립이 안되는 말이니까 그런 걸 기어이 고집을 해서 그래야만 믿는 거라고 그럴 건 없어요. 안 믿어지면 안 믿어도 괜찮아요. 난 안 믿어도 괜찮다고 그래요. 일 없어요. 또 부활을 했다면 정말 죽었던 시체가 일어나서 걸어다니느냐? 그래선 뭘해요? 그런 건 아닐거요. 그럼 그 시체가 지금은 어디로 갔단 말이냐 했다면 하늘로 올라갔다는데, 하늘로 올라갔다면 어디로 올라갔단 말이냐. 그것은 분명 죽은 줄로 알았는데, 자기네가 모이는 가운데 예수가 나타나 말씀하시는 거를 체험했어요. 종교적인 체험을 속일 수 없이, 한두 사람만 아니고 여럿이 다 있는 데서 그런 게 한 번 아니고 여러 번 그랬기 때문에 이것은 부인할 수가 없다 ― 그래 그렇게 된 건데, 그런 문제는 과학으로는 안 풀리는 것, 그런 건 뭐냐 하면, 우리가 알 수 없는 것이 우리 속에 깊은 곳에 있다는 거요. 사람이라면 결국 우주의 깊은 속에 뭣인지가 아직도, 이담에 가면 그것도 설명될는지 모르지만 적어도 지금으로서는 설명은 안 되는데, 분명히 사람이 체험을 하는 그런 게 있긴 있단 말이에요. 그러니까 그것을 부인할 수는 없지요.


 그런데 그럼 병을 고치는 건  어떻게 된 겁니까? 그건 심리적으로 정신통일을 해서 됮는 것도 있고, 그 정도를 넘은 것도 있고 그렇지요. 그러니까 지금도 노상 없는 건 아니지요. 우리도 해봤어요. 나 자신도 뭐 저 한동안은 우리 집에 있는 아이들보고도 그랬는데, “감기가 들어오면 그걸 맘대로 못 내쫓는단 말이냐? 내가 쫓으면 나가는 거지” 그런 소리까지 해본 일도 있는데, 그런다고 그게 반드시 오래 가냐 하면 그런 것은 아니에요. 그런 체험이 또 어느 정도 있지 전혀 없는 것도 아니고…….


 그렇지만 기도를 해서 병을 고친다고 그러고 예수님은 그걸 하시면서도 이건 말하지 말아야 한다 그러셨지요. 왜 말하지 말라고 그러셨을까. 그걸로 인해 잘못되는 일이 있을 거니까 말하지 말라고 그런 거 아니오? 자기는, 하나님이 그런 능력을 주었다고 그러셨는데, 그런 능력을 주어서 사람을 고치기는 고쳐요. 그때의 불쌍한 사람들을 위해서예요. 지금같이 의술이 발달된 것도 아닌 그런 때니까.


 지금은 몇 발짝 건너에 하나씩 병원이 있는데, 하필이면 기도해서 낫겠다고, 가서 약을 조금 바르면 되겠는데 안하고 기도하면 낫겠다고 하다가 안되면 망신만 하면서 그 고집은 또 뭔가.


 그러니까 기도함으로 해서 낫는 ― 그건 왜 그런고 하니 우리 속에 스스로 내 생명을 유지해가는 힘이 있으니까 ― 그러나 그것도 절대는 아니오. 죽을 때 이르면 죽거든. 아무리 정신통일이 돼서 그걸로 인해 건강했다고 그러더라도 죽을 때 안 죽는다는 법은 없어요.


 사람은 죽게 마련인 거니까. 그러나 엘리야 같은 사람은 안 죽지 않았습니까 그러겠지만, 그건 그때로 봐선 안 죽었지만 지금으로서는 모르지요. 그 다음에 엘리야가 어떻게 됐는지 요새 세상 사람으로 봐서는 그런 사람은 하나도 없으니까. 어쨌거나 사람인 다음엔 이 세상에 나서, 어느 정도 살다가 나이가 오래기도 하고 짧기도 하지만 반드시 죽는 거다 하는 걸 사실로 인정해야지, “이제도 잘 살기만 하면 안 죽을 수 있다”고 한다면 “안 죽는 거 해 보여 봐!” 하는데 해 보일 수 없지 않아요? 그건 되는 때가 있고 안 되는 때도 있으니까. 그런 거는 우리 힘을 초월한 그런 거 아니오? 그런데 대해서는 알 수 없어 분명히 말은 못하지만 이런 게 있다는 정도는 알고, 그러나 그 이상은 또한 모르겠고……, 그런 건 그만큼 인정을 하는 게 옳을 거예요.


 어쨌거나 퀘이커들은 그 점에 관해선 그걸 강조하지 않는단 말이에요. 예수가 말씀하신 그 정신적 의미들, 그걸 우리 생활에 실현하는 그 점을 강조하는 거, 그러니까 이렇게 앉아서 예배를 드리면 여기서 중요한 게 뭐냐 그러면, 나 혼자가 아니고 여럿이서 앉아서 이 가운데에 정말 참하나님이 계시다는 그런 확신에까지 가보도록 노력하는 것, 내 마음의 속의 빛이, 속의 빛이란 말로 하기가 어려운 건데, 있기는 분명히 있지 않아요? 그거는 무슨 이상한 걸 봐야만 아는 것이 아니지요. 우리가 생각하기에도 그건 있어요. 깊이 생각해보면 우리 속이 캄캄 어두울 때가 있고 밝을 때가 있단 말이에요. 그건 우리도 환히 아는 일, 우리 정도로도 그것은 아는 거지요.


 그런데 밝은 때가 있다고 해서 그것이 내가 힘써 된 거냐 하면 그런 것은 아니에요. 또 깜깜하다고 해서 내가 그러고 싶어 그런 거냐  하면 그런 것도 아니지요.


 어쨌거니 마음이라고 하는 세계에 들어가면 아직도 이치로만 설명이 안되는, 분명 그런 것이 있는 건 사실이에요. 그런 게 있다면 그럼 우주적으로 무슨 근본이 있지 않느냐 그렇게 생각되는 게 당연한 거고, 지금에 와선 어느 편에선 너무 그러니까 예수님은 그런 걸 하시면서도 이걸 이용해서 자기의 전도하는데 응용하려고 그러고, 무슨 운동을 일으킨다든지 그런 마음 없었어요. “말하지 말라, 말하지 말라” 그러고 가서 말해주셨어요. 할 수 없으니까 불쌍한 것들을 위해 주시고 그러셨지. 그럼 세상에 오셔서는 돌아다니면서 병이란 병은 내가 다 고친 다 그러셨나? 그런 거 아니오.

 

  지금 종교 믿는 사람은 아주 그걸 본업으로, 돈을 벌고 그걸로 인기가 올라가고, 그건 전혀 예수님의 가르침으론 안되는 거란 말이에요. 그런 의미에서 그건 반대해 마땅한 거예요.


 그렇지만 우리가 뭐하는 건, 이렇게 앉아서 각 개체가 다 있긴 하지만 어떻게 하면 우리 속에 있는 ― 나도 지내봐서 아는 대로 ― 내 속의 빛이 밝은 지경엘 가면 하나님이 과연 여기 계시지 하는 맘이 있어요. 평상시에 하나님을 믿는다고 그래도 정말 계실까 d니 계실까 그런 때가 많은데 말이오. 다 과거에 어느 정도 체험을 해본 게 있으면서도 역시 현실의 사람은 “어디 하나미 보여 주시오” 하게 돼요. 그렇지만 거 보여줄 수 없지요. “그럼 거짓말 아니오?” 거짓말은 아니지만 보여줄 순 없지. 그 이상을 말할 수가 없지 않아요? 그렇지만 지내본 것이 분명 있지요.


 목적은 이러는 가운데 나 혼자서가 아니라 둘이 모였거나 셋이 모였거나 우리 속에, 이 가운데서 체험을 하자는 거요. 나 하나의 개인의 체험이라면 나 혼자 열심히 기도하면 그런 체험을 하고 좋을는지도 몰라요. 그런 지경은 애들도 찾아요. 요새 보니까 애들이 본드를 사다 말고 그러는데 이놈들이 죽는 놈들이 생기는데도 그러는 건 황홀경을 추구한다는 건데, 이걸 봐도 마음속에 있는 황홀경 그걸 원하는 건 사실이란 말이에요.


 거 왜 원할까? 알 수 없지요. 그걸 하나가 잘못하면 죽고 폐해가 나는 줄 알면서도 황홀지경에 들어가려 하는 것은, 그건 그네들이 모르면서 무지하게 그러기는 하지만, 본래는 종교적 욕구에서 나오는 거요. 뭣인지 모르게 이 현실에서 좋기도 하지만 왜 내가 걸음을 걸으면 요것밖에 못 걸을까, 왜 요것밖에 못 들을까? 내가 말을 한다면 내 뜻이 얼마든지 퍼질 수가 있으면 좋겠는데 왜 못할까. 이 속에 갇혀있는, 소위 육신이라는 게 좋긴 하지만 참 내가 이 속에 갇혀 있어서 고민하고 있는 것만은 사실이란 말이에요.


 그런 줄을 모르는 때가 많지만, 스스로 스스로에게 충실한 생각을 하면 할수록 이 육체가 없으면 내가 못살긴 못살지만, 이걸로 인해서 요것밖에 못 된단 말이냐 하는 거기에 슬픔이 있어요. 만일 그게 없다면 시가 나올 리도 없고 그림도 나올 리 없고 음악도 나올 리 없어요. 그런 깊은 곳이 있기 때문에 시가 그림이 음악이 나오는 건데, 이런 거를 한편으론 근래에 과학이 발달해서 미신적 요소를 우리에게서 제거해 주니까 도리어 좋지 그게 우리에게 방해되는 건 없어요.


 그런 의미에서 중요한 것은 나 혼자서가 아니라 이렇게 앉아있는 이 사이에 우리 가운데 있다든지, 더 나아가 우리가 아무리 생각을 하고 기도를 한다 해도 내 몸뚱이 네 몸뚱이 이 사람 저 사람이 갈라져서 서로 이거를 잊을 수가 없는데, 어느 순간에 가면 이 가운데 하나님이 계시다 우리 가운데 계시다는 그 생각이 개인을 초월해서 시공도 초월해서 역사를 초월해서 있는 무슨 그런 일이 있는 것을 느껴보는, 시원하게 느껴봤다고 그럴 수는 없어요. 그렇지만 그럴 가능성이 있는 걸 바라서, 그럴 가능성이 있다는 것을 우리가 역사에 비추어서 생각할 수 있으니까, 그래 이리 앉았는 게 아니에요?


 그러니까 우리 하는 게 참되게 하질 못해요. 그래 힘이 드는 거예요. 난 분명 개인의 마음이지만, 내가 할 수 있는 건 개인의 마음속에 나오는 잡념을 제거해버리는 거고, 기도를 한다면 내 속의 기도를 하지만, 어떻게 하면 이것이 하나로 이 속의 전체의 것이 서로 통해서 이 속에 정말 우리 속에, 수가 많지도 않고 또 우리가 별 사람도 아니지만, 하나님이 정말 우리 속에 이 시간에 계시다는 것.


 그러는 걸 느껴보는 시간, 감히 우리가 그걸 완전하게까진 못 가도 비슷한 데를 느껴보기만 해도, 그래도 우리 안에 무엇이 있지 않아요? 감히 다 됐다고 증언할 사람은 아무도 없을 거예요. 하지만 그런 거니까, 참 수도 적고 그렇지만, 이제 앞으로 이 세계 속에서 사람의 생각이 달라지니까 종교도 많이 달라져야 할 거에요.


 그런 점이 있어서 과학이라든지 이런 거를 지내보고 여기서 전혀 사람이 경험하지 못하던 가지가지 험악한 죄악도 짓고, 나쁜 짓을 하려면 얼마든지 할 수 있는 걸 경험하면서, 그러면서도 역시 사람의 근본을 버릴 수 없는데, 사람이란 너나의 구별이 없이 사랑하는 것이 그 본능이에요. 사람만 아니라 생명을 사랑할 줄 알아야지 하는, 거기서 보람을 느끼고 그런 게 없이는 나는 살 수가 없다고 하는 종교적인 그런 것을 비교적 다른 사람에게 증거하려고 할 수가 있지 않을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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