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어떻게 퀘이커가 됐나

 

 

 내가 퀘이커 모임의 회원이 된 이후 “왜 퀘이커가 됐느냐?” 하는 질문을 종종 받습니다. 그럴 때마다 나는 싱긋이 웃고 맙니다. 옛날 시인같이 싱긋 웃고 대답 아니 함은 마음이 스스로 한가하기 때문입니다. 퀘이커가 됐음 어떻고 안됐음 어떻습니까? 문제될 것이 없습니다. 그러나 그래도 내 마음을 이해 못하고 추궁해 물을 때는 내 대답은 yes and no입니다. 됐담 됐고, 아니 됐담 아니 된 것이란 말입니다.

되기는 새삼 무엇이 됩니까? 됐다 해도 나 이상이 될 것 없고, 아니 됐다 해도 나 이하가 될 것 없습니다. 나 나대로인데 무슨 문제가 될 것 있습니까? 나는 돼서 된 것이 아니라 됨이 없이 되어진 것입니다. 그러나 또 나는 되자는 것이지 되자는 목적과 힘씀이 만일 없다면 사람이 아닙니다. 한없이 되자는 것이야말로 사람입니다. 돼도 돼도 될 수 없는 것을 돼보자고 시시각각으로 애를 쓰는 것이 삶이라는 것입니다.

내가 퀘이커 모임의 회원이 된 것은 사실입니다. 그러나 나는 퀘이커가 된 것은 아닙니다. 도대체 퀘이커는 돼서 될 수 있는 것입니까? 만일 돼서 될 수 있는 것이 퀘이커라면 나는 퀘이커는 되지 않았을 것입니다. 될 수 없는 것이 문제입니다. 될 수 없는 것이 되자고 애를 쓰는 동안에 돼진 것이 퀘이커일 것입니다.

‘왜'를 묻지만 왜란 것이 없습니다. 물론 생각하는 인간에 까닭이 없을 리 있습니까? 까닭을 물어서야말로 사람입니다. 하지만 까닭을 물으면 누가 대답을 합니까? 대답할 수 있는 것은 까닭이 될 수 없고, 까닭이 되는 것은 대답으로 보여줄 수가 없습니다. 삶의 까닭을 누가 압니까? 죽음의 까닭을 누가 압니까?

그럼, 첨이 그렇고 나중이 그런데 그 중간을 말해 무엇 합니까? 그럼 까닭은 묻지 말아야 합니까? 아닙니다. 아니 물을래도 아니 물을 수가 없습니다. 그러나 묻는다고 꼭 대답을 해야 하는 것은 아닙니다. 또 그 대신 대답은 꼭 물어서만 하는 것도 아닙니다. 물음 없는 대답도 있고, 대답 없는 물음도 있습니다. 대답 못할 물음이야말로 참 물음이요, 물음 없이 하는 대답이야말로 참 대답입니다. 물음으로 대답하고 대답으로 묻는 것 아닙니까? 참이란 그런 것 아니겠습니까?

이날까지 걸어온 내 생애를 돌아보며 나는 스스로 내린 하나의 판단이 있습니다. 나는 ‘실패의 사람'이라는 것입니다. 이날껏 해본 일은 많은데 된 것은 하나도 없습니다. 이렇게만 되자는 내 마음이 아니었습니다. 그러나 또 그러면서도 나는 역시 나였습니다. idea는 내게 반드시 없지 않습니다. 그러나 그 idea를 실제로 실현하려면 어떻게 할지를 모르겠습니다. 모른다기보다도 도리어 너무 잘 알아서라고도 할 수 있습니다.

안과 밖이 어떻게 먼 것이 너무도 빤히 내다뵈서 주저주저 하게 됩니다. 그러노라면 주위의 사정이 나를 몰아쳐서 가야할 데로 가고 맙니다. 가 놓고 보면 역시 그럴 수 밖에 없었구나 하게 됩니다. 그러면 내가 간 것이 아닙니다. 그래서 나는 이날껏 하나님의 발길에 채여 오는 사람이라고 합니다. 퀘이커가 된 것도 아마 잘 돼서 됐다기보다는 잘못돼서 된 것일 것입니다. 거기도 분명히 발길에 채인 느낌이 있습니다. 두려움과 평화, 슬픔과 감사, 부끄러움과 자신의 뒤섞인 것이...

까닭은 있다면 있습니다. 그러나 설명은 필요 없습니다. 까닭은 내 까닭이지 누구의 까닭이 될 수 없습니다. 믿음은 영혼의 지성소 안에서의 일입니다. 거기는 말이 없습니다. 침묵 속에 불사르는 생명의 향기가 있을 뿐입니다. 나는 생명의 지성소 안에는 시(詩)조차도 없다고 합니다. 하물며 설명이겠습니까? 설명은 현상계의 일입니다. 하나님의 발길에 채인 사람이 말이 어떻게 있겠습니까?

그러나 또 이웃 속에 사는 내가 어떻게 말을 아니 할 수 있습니까? 나는 지성소에서 나온 사가랴 모양으로 서투른 시늉으로 내가 어떻게 그의 발길에 채여 굴던 경로를 간단히라도 그려서 각 사람 속에 있는 하나님의 것에 대답을 해보려 하는 수밖에 없습니다.

(To answer that of God in every men)

나는 1901년 3월 13일 한국 맨 서북 끝 황햇가 조그만 농촌에서 났습니다. 그때 한국은 정치적으로 경제적으로 파산상태에 있었습니다. 그런데 거기서 민중을 건져줄 종교가 없었습니다. 예로부터 오는 유교도, 불교도, 선도(仙道)도 있기는 있었으나 굳어진 전통, 죽은 의식 형식 뿐이요, 창조적인 생명력이 하나도 없었습니다. 그러므로 사회에는 무지와 미신과 부패가 가득 차 있어서 사람들은 자포자기 할 뿐이지 감히 희망을 가지고 생활을 개조해보려는 의욕을 내지 못했습니다.

그런데 일반이 다 그러한 시대에 있어서 나는 다행이도 첨부터 활발한 새 교육을 받고 자랄 수가 있었습니다. 그것은 그때 새로 전파도기 시작한 기독교가 우리 마을에 들어왔기 때문이었습니다. 본래 내가 난 평안도는 한국의 ‘이방의 갈릴리'여서 여러 백년 두고 ‘상놈'이라 천대받는 지방이었고, 그중에서도 우리 마을 같은 데는 ‘스불론, 납달리'처럼 ‘바닷가 놈들'이라고 해서 머리도 못들고 살았습니다. 그러나 그 불행이 도리어 복이 됐습니다. 사회의 밑바닥이기 때문에 그 심한 정치적 혼란기에도 거기는 평화가 있었고, 업신여김을 받았으니만큼 새것을 받아들이는데 빨라서 새 시대에 앞장을 섰습니다. 그리해서 나는 이 ‘죽음의 그늘진 땅에 앉은 사람들' 속에 났으면서도 ‘큰 빛' 속에 인생의 뱃길을 떠날 수 있었습니다.

그때 내가 받은 교육은 한 마디로 ‘하나님과 민족'이라 할 수 있습니다. 우리는 그때 그것을 ‘새 문명'이라 했습니다마는 그것은 두 얼굴을 가지는 스핑크스였습니다. 기독교와 민족주의, 이것은 그때에 적어도 세속적으로는 꼭 알맞은 것이었습니다. 그때 이 ‘은둔국'은 봉건제도의 낡은 껍질을 벗고 새 시대에 들어가야 하는 때였기 때문입니다. 한국에 기독교가 빨리 번져나간 원인을 여러 가지로 설명할 수 있으나, 그 중에 잊어서 아니되는 하나는 그것이 민족주의를 타고 왔다는 사실입니다. 영혼의 구원도 처음 듣고 매력있는 소리지만 일본의 압박을 물리치고 나라를 독립시키기 위하여는 서양 선진국의 종교를 믿어야 한다는 생각에 교회에 들어온 사람도 많았습니다.

그 교회는 장로파였으므로 우리는 거의 청교도에 가까운 엄격한 신조의 교육을 받았습니다. 나는 그것을 지금도 고맙게 생각합니다. 사실 그 썩어진 망국 시기에 있어서 그러한 기독교교육을 받은 사람들이 아니었더라면 사회적 양심은 완전히 파멸되고 말았을 것입니다. 그때에 교회는 정말 희망의 등대였습니다. 나는 열세 살까지 지금 생각하기에도 순진한 기독소년이었습니다.

아홉 살 때 나라가 일본한테 아주 망하고 어른들이 예배당에서 통곡을 하는 것을 보았을 때 나는 어린 마음에 크게 충격을 받았습니다. 그러나 믿음으로 인해 아주 낙담하지는 않았습니다. 그러나 이담에 의사가 될 목적으로 자존심을 꺾고, 이때까지 더럽게 여기던, 일본말로 가르치는 공립학교에 다니기 위해 도시로 나갔을 때 내 순진성은 많이 없어졌고, 과학을 배우는 동안 성경에 대해 의심이 생기기 시작했습니다.

그러다가 3.1운동으로 인해 처음으로 조금 깊은 의미의 자각이 시작됐습니다. 3.1운동이란 것은 1차 세계대전 후 파리강화회의를 모이게 될 때 미국 윌슨 대통령이 제출한 민족자결주의의 영향을 입어 일본의 강제 압박을 면해보려고 전 민족적으로 일으켰던 비폭력 반항운동입니다. 이것은 기독교, 불교, 천도교 세 종교가 연합해서 주동이 되어 일으킨 것인데, 한국 민족의 자각 운동에 있어서 큰 의미를 가지는 사건이요, 그때의 젊은이로서 그 영향을 입지 않은 사람은 없을 것입니다. 운동은 물론 표면으로는 실패했습니다. 세계 큰 나라들의 정의감을 믿고 일어났던 것이나 그들이 그것을 알아줄 리가 없었습니다.

그러나 기대했던 독립은 얻지 못했어도 깨기 시작한 민중은 낙심하지 않았습니다. 운동은 속으로 파고들기 시작했습니다. 전국적으로 신문, 잡지, 책, 강연, 학교를 통해 문화운동을 일으켰습니다. 나도 그 영향을 입었습니다. 평양에서 중학교를 다니다가 그 운동에 참가하고 학교를 그만두고 집에 돌아와 2년 동안을 있는 동안 속이 많이 썩었습니다.

그러다가 1921년에 다시 공부를 계속하려고 오산학교에 들어갔습니다. 오산학교는 3.1운동의 지도자인 이승훈 선생이 세운 학교였습니다. 그는 일찍이 고아가 되어 열한 살 때부터 남의 공장에서 심부름을 하면서 제 주먹으로 인생을 닦아올린 열성과 의지의 사람이요, 전국적으로 큰 무역상이 됐다가 나라 일이 어려운 것을 보고 “우리도 교육해야 산다”는 생각에 생활을 일변하고 학교를 세워 거기 전력했습니다. 그의 교육은 기독교신앙과 인도주의와 민족주의가 한데 녹아든 철저한 정신교육이었습니다. 선생과 학생이 침식을 같이 하며 살아나가는 오산은 그때 그 민족운동의 한 중심이었습니다. 그가 주동이 되어 3.1운동을 일으키자 일본 헌병은 학교에 불을 지르고 그를 감옥에 넣었는데, 동지들이 그것을 다시 부흥시켰습니다. 내가 갔던 때는 옛 모습은 많이 없어지고 초라한 초가집에 학생들이 모여있는 때지만 그래도 나는 이제 정말 참교육을 본다 하는 느낌이었습니다.

거기서 이담에 의사가 된다는 생각을 버리고, 처음으로 나는 한국이 뭔가를 찾기 시작했습니다. 그것은 그때에 교장이었던 유영모 선생의 영향이었습니다. 노자를 처음으로 안 것은 그에게였습니다. 이때부터 나는 옛날같이 남을 따라 마련된 종교를 믿기보다는 좀더 참된 믿음을 요구하는 마음이 시작됐으나 교회에서 그것을 얻을 수는 없었습니다. 신앙과 민족주의가 한데 든 것은 처음에는 힘있어 좋은 듯 했으나 그 폐단이 차차 나타나게 됐습니다. 독립의 희망이 있어뵐 때 그것은 놀라운 형세로 번져나갔지만 일본의 통치가 점점 굳어지고 표면으로 어느 정도 개량된 문화정책을 쓰게 되자 지난날의 지사(志士)라던 사람들이 많이 타협을 하게 됐고, 종교는 점점 현실에서는 먼 신조주의(信條主義)로 굳어지기 시작했습니다. 그것이 나는 싫어서 교회에 대해 비판적이 되기 시작했습니다.

그러다가 1923년 나는 대학공부를 하기 위해 일본 동경으로 갔을 때, 그해 9월에 큰 지진이 일어나 동경시의 3분의 2가 타버렸습니다. 그때에 불경기를 타서 움직이기 시작한 사회주의자들의 혁명이 일어날까봐 두려워하는 일본 정치가들은 민심수습책으로 일부러 유언(流言)을 만들어 한국인이 폭동계획을 한다 선전하고 한국 사람을 여러 천명 학살했습니다. 나는 번민하기 시작했습니다. “기독교를 가지고 내 민족을 건질 수 있느냐?”고... 현실 형편으로는 사회주의 혁명 밖에 길이 없는 듯 하나 그렇다고 신앙을 버리고 도덕을 전혀 무시하는 사회주의 운동에 가담할 수도 없었습니다. 나는 오래 두고 기독교와 사회주의 사이에서 고민했습니다.

그러던 때에 뜻하지 못했던 빛을 만났습니다. 1924년에 나는 교육대학에 들어갔습니다. 그때 우리나라 형편으로는 교육이 시급하다 생각했기 때문에 일본 갈 때부터 이미 목적은 교육으로 정했습니다. 한국 사람이라면 하숙도 들이지 않으려 해서 얼굴도 못들고 다니던 겨울도 지나가고 새로 입학한 기쁨에 교회를 찾아가던 어느 일요일, 나는 나보다 한해 윗 학년인 김교신(金敎臣)이 우찌무라의 성경연구회에 나간다는 것을 알게 되었습니다. 우찌무라 선생의 이름은 오산 있을 때 유영모 선생에게서 이미 들었습니다.

그의 백치원에서의 유명한 일화를 듣고 감명이 깊었으나 그가 생존한 인물인지 아닌지도 몰랐습니다. 그런데 이제 그 우찌무라의 이름을 들었을 때의 내 놀람과 반가움! 물론 그의 신앙, 사상이 어떤지 알지도 못하고 그저 존경하는 선생이 소개해 준 것이기 때문에 무조건 믿는 것입니다. 그래서 그 후 나는 곧 그 무교회 모임에 나가게 됐습니다. 그는 홋카이도 대학 출신으로 저 유명한 윌리암 클락(William S. Clark)의 영향으로 기독교를 믿게 된 사람입니다. 미국 앰허스트 대학(Amherst College)에서 신학 공부를 한 일도 있고, 처음에는 일본에 돌아와 교회에서 일도 했으나 강직하고 자유?독립?정의의 정신에 불붙는 그는 교회 안에 있는 형식과 거짓에 견딜 수 없어서 나와서 독립 전도를 시작했는데, 세상이 알기를 무교회주의(無敎會主義)로 압니다. 아무 형식?의식 없이 단순히 모여서 예배하는데, 그 특색은 성경을 중심으로 삼고 십자가에 의한 속죄를 강조하는 아주 정통적인 신앙이라는데 있습니다. 그는 저서도 많고, 지금 일본의 정신적 지도자에는 그의 제자가 많습니다.

내가 첨으로 갔던 날, 그는 예레미야 강의를 하고 있었습니다. 본래 애국심이 강한 그는 “이것이 참 애국이다”라고 신앙을 강조했습니다. 당장 그 자리에서라고는 할 수 없으나, 나는 계속해 나가는 동안에 번민이 해결되고, 나는 아주 크리스챤으로 나갈 것을 결심했습니다. 참 신앙이란 이런 것이다, 성경이란 이렇게 읽어나갈 것이다 하는 확신이 생겼습니다. 나는 이따금은 우리가 일본에게 36년간 종살이를 했어도 내게는 우찌무라 하나면 바꾸고도 남음이 있다 하기도 합니다.

교육대학을 졸업하고는 오산에 돌아와 10년 동안 선생 노릇을 했는데, 나는 역사 교사 된 것을 후회했습니다. 그것은 소위 역사란 것은 온통 거짓말 투성이요, 우리 민족의 역사를 볼 때 비참과 부끄럼의 연속인 것을 부인할 수 없는데, 그것을 어떻게 가르치나 하는 생각에서였습니다. 사실대로 말하자니 어린 마음에 자멸감 낙심만 날 터이요, 남이 하는 것같이 과장하고 꾸미자니 양심이 허락지 않고...

나는 생각하고 생각했습니다. 나에게는 버리지 못할 것이 세 가지 있습니다. 첫째, 나는 한민족이니 내 민족적인 전통은 버릴 수 없습니다. 다음, 나는 하나님을 믿습니다. 신앙을 버리고 살 수는 없습니다. 셋째로, 나는 과학을 배웠습니다. 더구나 1차 대전 이후 나온 H. G. Wells의 The Outline of History 를 매우 탐독해서 그의 세계국가주의(世界國家主義)와 과학주의의 영향을 많이 받았으므로 신앙을 위해 과학을 무시한다는 일은 비겁한 것으로 보였습니다. 사사 없이 진리를 탐구한 과학자가 교회에 속하지 않았다는 이유로 지옥에 가야 한다면 나는 그까짓 종교는 믿지 않는다고까지 했습니다. 그러니 그 셋을 다 살리면서 어떻게 하면 역사 교육을 할 수 있을까?

그런데 어떤 날 어떻게 된 것인지 모르게 이런 생각이 떠올랐습니다. “고난의 메시야가 영광의 메시야라면 고난의 역사는 영광의 역사가 될 수 없느냐?” 나는 십자가의 원리를 민족에 적용하기로 했습니다. 그래서 다시 용기를 얻고 교수를 계속했고, 그렇게 해서 나온 것이 나의 ‘고난의 역사'입니다. 나는 한국 역사의 key note를 suffering으로 잡고, 그 견지에서 모든 사건을 해석했습니다.

우찌무라 모임에 있을 때 한국 학생이 여섯이 있었습니다. 그래서 여섯이 동지가 되어 신앙 잡지를 내기로 하여 그 이름을 ?성서조선?(聖書朝鮮)이라고 했습니다. 학교를 마치고 다 귀국한 후에 처음에는 여섯이 분담해 가면서 내다가 나중에는 김교신이 맡아서 혼자서 냈는데, 나는 내 역사와 그 밖의 글을 거기 실었습니다.

오산 10년은 대체로 십자가 중심 신앙의 충실한 무교회 신자였습니다. 그러나 우리는 본래 교파적인 것을 싫어하여 무교회주의라는 말을 쓰려고 하지 않았는데 무교회도 차차 자기 주장을 너무 하여 하나의 교파로 되어가는 경향이 있고, 또 우찌무라를 존경하는 나머지 개인숭배 같은 태도가 보이는데 나는 반동을 느껴 차차 선생 모방을 피하고 나는 나대로 서는 자리에 가자고 힘을 쓰게 됐습니다. 또 한편 독서의 범위를 넓혀가고 생각을 파 들어감에 따라 의문이 일어나기 시작했습니다. 그 주요한 것을 말하면, 하나는 나도 자주(自主)하는 인격(人格)을 가진 이상 어떻게 역사적 인간 예수를 신앙의 대상으로 삼고 ‘주여' 할 수 있느냐 하는 것이고, 또 하나는 자유(自由)하는 의지(意志)를 가지는 도덕 인간에 대속(代贖)은 어떻게 이루어지는 것이냐 하는 것이었습니다. 생각하다 생각하다가 나는 내딴으로 풀었습니다. 나는 역사적 인간 예수를 믿는 것은 아니고, 믿는 것은 그리스도다. 그 그리스도는 영원한 그리스도다. 그는 예수에게만 있는 것이 아니라 내 속에도 본질적으로 있다. 속죄는 그 그리스도를 통하여 예수와 내가 서로 딴 사람이 아니요 하나라는 체험에 이르러서만 될 수 있다. 그러므로 역사적 인간 예수가 내 죄를 대신했다 해서 감사하는 것은 하나의 감정 뿐이지 그것으로 죄가 깨끗해질 수는 없다고 생각하게 됐습니다. 이것이 우찌무라의 가르침과 다른 것은 물론입니다. 그러나 나는 구태여 그것을 남에게까지 강요하고 싶지는 않았고, 그 때문에 아직 나는 무교회는 아니다 하고 싶지도 않았습니다. 그대로 몇 해가 갔습니다.

오산 있는 동안 나는 언제나 교육과 신앙과 농촌을 하나로 연결시켜 생각했습니다. 정치적인 것에 전혀 관심을 두지 않는 나는 한국의 구원은 믿음을 중심으로 하는 교육으로 농촌을 살려내는 이외에는 없다고 생각했기 때문입니다. 나는 그것을 사명으로 오산에 끝까지 있을 것으로 생각했고, 남들도 그렇게 알았습니다.

그런데 하나님의 발길은 딴 곳을 향하고 있었습니다. 1936~37년으로 일본의 정책은 점점 가혹해져서 한국 사람에게서 민족정신을 아주 긁어내버리려고 했습니다. 나는 교문을 닫을지언정 거기 굴복하지는 말자는 생각이었는데, 학교 경영자의 생각은 타협주의였으므로 나는 부득이 거기서 죽을 줄 알았던 오산학교를 나와야 했습니다. 1938년 봄, 나는 눈물로 교문을 나왔습니다. 학교를 나왔지만 나는 차마 학생을 떠날 수는 없었습니다. 무엇을 다 뺏기고 가슴이 텅빈 느낌이었습니다. 드디어 농사를 하면서라도 오산에 머물기로 결심하고 일요일 모임을 통해 학생들을 만나면서 두 해를 거기 있었습니다. 그러다가 1940년 평양 시외에 누가 정말식고등국민학교를 경영하던 것을 넘겨줄 것이 있다 해서 그리로 나갔는데, 가자마자 그 전의 설립자가 독립운동 했다는 혐의로 검거됨으로 나도 거기 관련이 되어 감옥에 들어갔습니다. 무슨 죄가 있는 것 아닙니다. 한국사람 된 죄입니다.

1년을 있다가 나오니 아버지는 그동안 세상을 떠났고, 집안은 엉망입니다. 빚 정리를 하려고 있는 땅을 가지고 농사를 하며 있노라니 한 해가 지나 1942년 봄 이번에는 서울서 사건이 생겨 또 잡으러 왔습니다. 우리가 내던 ?성서조선?이란 잡지가 문제된 것입니다. 이때 일본 군벌들은 태평양전쟁이 차차 어려워지자 한국이 만일 반항을 일으키면 자기네에게 치명상이라 생각해서 갖은 방법을 다해서 그것을 막으려고 했습니다. 그래서 소위 일본국민화 정책이란 것을 써서 한국의 말, 글, 의복을 다 못쓰게 하고, 나중에는 이름까지 일본식으로 고치도록 강제를 하고, 조금이라도 민족사상?자유사상이 있는 사람이면 모조리 구실을 만들어 감옥에 집어넣고 자기네 말로 ‘썩히'는 것이었습니다. 그래서 ?성서조선?도 그 전에 다 허가를 얻어가지고 내던 순 신앙잡지인데, 이제 와서 새삼 문제를 만든 것입니다. 이리해서 1년을 있다가 석방되어 집에 돌아오니 앞이 막막했습니다. 수염을 자라는 대로 두고, 메트리를 신고 아주 농사군 할아버지가 되어 끝장이 나는 때까지 기다리기로 했는데, 2년 후에 해방이 왔습니다.

감옥을 나는 인생대학이라고 합니다. 학교나 사회에서 못배우던 것을 거기서 많이 깨닫게 됩니다. 거기서는 밖의 선생이 아니고 제 속에 있는 참 선생이 가르쳐주기 때문입니다. 감옥에 간 경험은 여러번 있습니다. 모두 다 나는 나 노릇 하잔 죄로 이것이 네 번째 아직도 세 번 더 있는데 이때에 얻은 것이 가장 많습니다. 불교 경전을 보게 됐고, 노자?장자를 더 읽었습니다. 어느 정도의 신비적인 체험도 얻었습니다. 나는 모든 종교는 궁극에 있어서는 하나라는 확신에 이르렀습니다.

감옥에서 나온 소감은 조금 넓은 감방 뿐이지 다름없다는 것이었습니다. 그 한국이라는 혹은 집이라는 감방 속에 가만 앉아 역사의 돌아가는 것을 보면서 한 내 생각을 간추리면 이런 것입니다.

“이것은 단순히 국경선의 변동에만 그치지 않을 것이다. 인간 사회의 구조가 근본적으로 달라지려는 세계혁명의 시작이다. 세계는 한 나라가 되어야 한다. 국가관이 달라져야 한다. 대국가주의시대(大國家主義時代)가 지나간다. 세계관이 달라지고 종교가 달라질 것이다. 아마 지금과는 딴판인 형태를 취할 것 아닐까? 종교의 근본 진리야 변할 리 없지만 모든 시대는 그 영원한 것의 새로운 표현을 요구한다. 각 시대는 제 말씀을 가진다. 장차 오는 시대의 말씀은 무엇이며, 누가 받을까? 새 종교개혁이 있기 위해 이번도 새 학문의 풍(風)이 일어나야 하지 않을까? 그러면 역시 과거의 새로운 해석이 있어야 할 것이다. 새로운 고전(古典) 연구가 필요하다. 그 고전은 어떤 것일까? 서양 고전이 될 수는 없다. 그것은 이미 다 써먹었다. 그럼 동양 고전을 다시 음미하는 수밖에 없을거다. 막다른 골목에 든 서양 문명을 건지는 길은 동양을 새로 맛보는 데서 나올 것이다.”

이것은 아주 막연하고 조잡한 생각입니다. 하지만 나는 그런 생각을 아니할 수 없었습니다. 그중에도 나는 초점을 새 종교에 두고 줄곧 그 생각만 했습니다. 기성 모든 종교는 지금의 국가주의와 너무 깊이 붙었기 때문에 거기서 손을 떼고 나오기가 매우 어렵고 낡은 문명과 함께 역사의 쓰레기 통으로 들어가지 않을까 생각했습니다.

그러는 동안에 해방이 갑자기 와서 전날에 나를 보고 “저 사람은 감옥 가는 것이 일”이라고 하던 민중에 이끌려 임시 자치위원회 회장이 됐고, 그것이 인연이 되어 평안북도 임시정부의 교육부장의 책임을 한때 맡기도 했습니다. 내게 맞지 않는 일인 줄 알면서도 그 정치적 공백기에 사회 질서를 위해 부득이한 일이라고 생각하고 나갔습니다. 그러나 그 때문에 소련군 감옥에 두 차례나 들어갔고, 나중엔 그냥 견딜 수 없어 남한으로 넘어왔습니다. 와서는 무교회 친구들을 만나 그들의 협력으로 일요종교강좌를 열어서 1960년까지 계속하면서 내 생각을 발표했고, 혹은 글로 쓰기도 했습니다. 그 결과 나는 많은 공명자를 특히 대학생층에서 많이 얻었습니다. 그 대신 교회에서는 이단이라 낙인을 찍었고, 무교회 친구 사이에도 차차 소외하는 기미가 있었습니다. 이유는 주로 “십자가 소리를 아니하고” “기도를 아니한다”는 것과 너무 동양적이라는 것이었습니다. 그러나 나는 십자가를 부인하는 것이 아니라 십자가는 바라볼 것이 아니라 몸소 지도록 노력해야 한다는 것이요, 기도는 아니하는 것이 아니나 다만 공중기도는 형식과 인간끼리의 아첨에 지나지 않는 일이 많으므로 될 수록 삼가는 것 뿐이며, 동양적인 것을 배척하는 데 대하여는 나는 확신을 가지고 싸웁니다. 대개는 유교?불교의 깊은 뜻은 알지도 못하고 그저 교파적인 좁은 생각에 반대하기 때문입니다.

그대로라면 나는 역시 구태여 무교회를 나오려 하지 않았을 것입니다. 그러나 중대한 사건이 생겨서 나는 무교회에서 나오게 됐습니다. 그것은 온전히 나의 잘못으로부터 온 것이었습니다. 내가 간디를 좋아하기 시작한 것은 오래 전부터였습니다. 오산 시절에 이미 Young India 를 구해서 읽었습니다. 그러나 1948년 그의 죽음 이후 더 열심히 읽게 됐고, 조그만 연구회를 가지기도 했었는데, 동지들 사이에서 그의 아슈람(Ashram) 비슷한 것을 하나 만들자고 해서, 또 땅을 내놓는 사람도 있었기 때문에 1957년에 서울서 50여km 떨어진 천안이라는 곳에 농장을 하나 마련하고 젊은이 몇 사람과 같이 지내기로 했습니다. 농장 이름을 ‘씨알'이라 붙였는데, 씨알이라는 말은 물론 Seed의 뜻이지만 나는 또 이것을 민중이라는 의미로도 썼습니다. 당초에 친구들이 내가 중심이 되어 그것을 하자고 할 때도 나는 자신이 없었습니다. 겸손이 아니라 공정하게 보아서 내가 그런 지도를 할 만한 실력이 있다고 생각이 되지 않았습니다. 그러나 주위에서 하는 권고에 못이겨 승낙을 했는데 거기서부터가 잘못이었습니다. 나는 시련에 못견뎠습니다. 도저히 변명할 수 없는 잘못을 저질렀습니다. 형세는 돌변했습니다. 모든 친구가 다 외면했습니다. 잘못은 물론 큰 잘못이지만 나는 친구들이 나를 버리기까지 하리라고 생각은 하지 않았는데 그렇지 않았습니다. 아무도 내 상처를 어루만져 회복시켜 주려고 하지 않았습니다. 나는 외로웠습니다. 소련군에 붙들려 다발총 피스톨이 열개 스무개 한꺼번에 가슴에 와 닿았을 때는 도리어 편안히 견딜 수 있었는데 친구들 다 잃고 나니 견딜 수가 없었습니다. 내게서나 남에게서나 생각으로 믿고 감정으로 감격하던 십자가가 어떻게 소용없는 것을 절실히 느꼈습니다. 죄를 용서하는 것이 가장 중요한 일인 것을 내가 죄인이 돼보고서야 알았습니다. 사람은 혼자서는 살 수 없는 것을 잘못이 있는 사람일수록 친구가 필요한 것을 그때에야 알았습니다. 그때의 심경을 나는 이렇게 그렸습니다.

십자가도 거짓말이러라
아미타불도 빈말이러라
“우리가 우리에게 죄지은 자를 사하여 준 것같이 우리 죄를 사하여 주옵시고”도 공연한 말뿐이러라
내가 쟝발장이 되어보자고 기를 바득바득 쓰건만 나타나는 건 미리엘이 아니고 쟈벨 뿐인 듯이 보이더라
무너진 내 탑은 이제 아까운 생각 없건만 저 언덕 높이 우뚝 우뚝 서는 돌 탑들이 저물어가는 햇빛을 가리워 무서운 생각만이 든다.

그때에 내가 그렇게 친구들 그리고 있는 때에 바로 내 앞에 퀘이커가 나타났습니다. 퀘이커에 관해서는 오산 시절에 칼라일(T. Carlyle)의 의상철학(衣裳哲學, Sartor Resartus)을 읽다가 조지 폭스(George Fox)의 leather broach 대목에서 너무 감명이 깊어서 폭스의 전기를 하나 사오기는 했으나 못읽고 말았고, 그 다음 읽는 책 속에서 퀘이커라는 명사가 더러 나왔으나 언제나 좀 별난 사람들이라는 뜻으로 밖에 아니 씌어있었습니다. 정말 흥미를 느낀 것은 2차 대전 때 많은 퀘이커들이 양심적 병역거부를 했다는 소식을 들은 때였으나 언제 만나려니 하는 생각은 하지도 못했는데 이제 노 퀘이커가 나를 찾아왔습니다. 한국전쟁 후 구호사업을 하기 위해 왔던 퀘이커들을 만나 첨으로 퀘이커가 된 이윤구는 내 일요모임의 회원이었습니다. 이제 그를 통해 알게된 것입니다. 퀘이커를 이해해서가 아니라 갈 곳이 없는 나는 물에 빠진 사람이 지푸라기라도 붙드는 심정으로 퀘이커 모임에 나갔습니다. 그것이 1961년 겨울입니다. 맨 처음으로 만난 퀘이커 Arthur Mitchell이 내가 내 이 얘기를 다한 때의 대답은 “You were already a Quaker before you became a Quaker.”였습니다. 이리해서 나는 1962년에 Pendle Hill에 가서 열달 동안, 다음 해 봄에 Woodbrooke에 가서 석 달을 있게 됐지만 그때까지도 나는 퀘이커가 될 생각은 없었습니다. 나는 언제까지나 하룻밤 뽕나무 그늘 밑에서 자고 가려는 중의 심정이었습니다. 정말 회원이 되기로 결정한 것은 1967년 태평양 연회의 초청으로 North California에서 열렸던 세계대회에 참석하고 난 다음이었습니다. 무슨 각별한 좋은 것이 있어서보다도 나는 friend들이 나를 대해주는데 어떤 responsibility를 느껴서입니다.

그래도 나는 여전히 ‘수평선너머'를 내다봅니다. 내가 황햇가 모래밭에서 집을 지었다 헐면서 놀 때에 내다보던 수평선, 피난 때 낙동강 가에서 잔고기 한 쌍 기르다 죽이고 울면서 내다보던 수평선, 영원의 수평선 너머를 나는 지금도 내다봅니다.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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