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 진리와 함께 전하며 가르치며 - 전도 여행

조지 폭스가 진리를 전하기 시작한 것은 종교 체험이 있은 1647년부터였습니다. 이 후, 그는 잉글랜드, 웨일즈, 아일랜드, 스코틀랜드, 아메리카 지역까지 두루 돌며 오해와 박해 가운데서도 담대하게 진리를 전하였습니다. 심각한 정치의 혼란을 겪던 시기였기 때문에 그의 행동은 반란을 목적으로 하는 것으로 오해를 받거나 모함을 받았고, 수없이 부당한 처우를 받았습니다. 그러나 그는 담대했습니다. 그는 기도하며 전도하는 사람이었습니다. 윌리엄 팬은 폭스의 기도가 자신이 보고 느낀 기도 가운데 가장 놀랍고도 생생하고 경건한 기도라 증언한 바 있습니다. '그의 영혼은 무게와 깊이가 있었고, 말과 행실이 진지하였고, 말수는 적었지만 매우 설득력이 있었습니다.' '그것은 그가 하나님과 가까이 동행하였음을 증거하는 것이었습니다.' 그는 '속의 빛'을 전하면서도 성경을 바로 알 것을 가르쳤습니다. 성서는 그의 행동과 가르침의 규범 역할을 했으며, 폭스에게 있어 속의 빛과 성경은 뗄 수 없는 관계였습니다.

하나님께서 하나님의 영을 통해 성경을 주셨다는 것과, 선지자들과 사도들이 배웠던 하나님과 그리스도를 알기 위해서는 모든 사람들은 자기 안에 있는 하나님의 영께로 나아가야 한다는 것과, 바로 그 영으로 말미암아 모든 사람은 성경을 바로 알 수 있을 것이다.

진리를 전파하러 전국을 돌기 시작한 초기에, 폭스는 논쟁적인 목적으로 열리는 한 집회에 참석하게 되었습니다. 설교자의 설교가 끝난 후, 어떤 여성이 '너희가 거듭난 것은 썩지 아니할 씨로 된 것이니'(벧 1:23)라는 구절의 뜻을 설교자에게 물었습니다. 그러자 설교자는 '교회에서 여자가 말하는 것을 허락지 않는다'고 하면서 말을 막았습니다. 사실 이것은 '누구든 말할 수 있다'고 말했던 설교자 자신의 말을 모순되게 하는 것이었습니다. 폭스가 다른 방향에서 이 논쟁에 가세했습니다. "이 뾰족집(steeple-house)을 교회라고 하십니까? 아니면 여기 함께 섞여 있는 사람들을 교회라고 하십니까?" 설교자가 대답 대신 폭스의 의견을 묻자, 그는 이렇게 대답했습니다.

교회는 살아 있는 돌, 곧 살아 있는 사람들로 구성된 영적인 집으로 진리의 기둥과 초석이 되는 곳이며 그리스도께서 머리가 되는 곳이지만, 그리스도께서는 섞여 있는 군중의 머리도 아니시며 석회나 돌이나 나무로 만든 오래된 집의 머리가 되시는 분이 아니다.

폭스는 대성당이나 집회 장소로 쓰이는 건물에 대해서는 뾰족집이라 부르며 드물게 '영적인 신앙 공동체'에 한해서만 '교회'라 했습니다(폭스 이후로 퀘이커들은 자신들이 모여 예배드리는 곳을 "모임 집"(meeting-house)이라 부릅니다).
폭스는 모든 사람을 평등하게 존중하였으며 그렇게 가르쳤습니다. 사회의 약자(고아, 과부, 나그네)를 찾아보고 돌보는 것이 참된 종교라고 전했습니다. 노예들을 학대하지 말고 오직 옳고 공정하게 대하라고 권고하며, 노예들에게는 의무를 다하며 정직할 것을 충고했습니다. 노예에 대한 이러한 태도는 계승 발전하여 나중에 미국에서 퀘이커들의 선도적인 노예폐지 운동으로 이어졌습니다. 또한 폭스는 사람을 차별해 부르던 당시의 호칭 You를 사용하지 않고 Thou(그대), Thee를 사용하여 불렀으며, 신분과 지위 고하에 따라 모자를 벗는 일도 거부했습니다. 이러한 일들은 사람들을 매우 불쾌하게 만들어 시비의 대상이 되었으며, 법정에서도 그가 과연 그럴 것인지를 두고 사람들 사이에 지대한 관심을 불러 일으켰습니다. 폭스는 법정의 재판관 앞에 불려가서 You 대신 Thou를 사용하고 모자를 벗지 않음으로써 자신의 신앙과 신념을 그대로 실천해 보였습니다. 모자를 벗음으로써 법정의 권위를 도모하던 시절에 그는 "모자를 벗음으로 얻게 되는 영광은 하나님께서 땅에 묻으실 영광이며, 사람에게 속한 것으로서 사람들끼리 서로 얻고자 하는 영광이자 불신자의 표적"이라고 생각했던 것입니다.
진리를 전하는 중에 폭스는 여러 번 감옥에 갇히기도 했습니다. 그 대부분이 오해와 시기, 모함에 의한 것이었지만, 맹세하기를 거부함으로써 갇힌 경우도 있었습니다. 1662년에 '퀘이커교도라고 하는 특정한 사람이나 맹세하기를 거절하는 사람들이 일으킬 수 있는 사고나 위험을 막기 위한' 법률안이 통과되었는데, 거기에는 맹세를 거부하거나 다른 사람에게 맹세를 하지 못하도록 설득하는 행위는 대체로 불법이며, 하나님의 말씀과는 맞지 않는 것이라고 선언되어 있었습니다. 재판관들은 폭스에게 잉글랜드 국왕의 주권과 그에 대한 충성을 승인하는 맹세를 강요했습니다. 그러나 폭스는 '평생 한번도 맹세를 한 적이 없으며, 약속이나 계약을 맺은 일도 없다'면서 맹세를 거부했습니다. 맹세를 거부하는 이유가 그 자신에게는 매우 분명했습니다.

나는 맹세하는 것에 충성하지 않고, 진리와 신뢰할 수 있는 것에 충성합니다. 나는 모든 사람을 존중하는데 하물며 왕이라면 말해 뭐하겠소! 그러나 그리스도께서는 맹세하지 말라 하셨습니다. 제가 지금 그리스도의 말을 따라야 하겠습니까, 아니면 당신의 말을 따라야 하겠습니까?

결국 폭스는 수감되었고, 그 재판이 열렸던 마을에는 다음과 같은 소문이 있었다고 합니다. '법정에서는, '도무지 맹세하지 말라'는 성서를 두고 맹세하라고 폭스에게 성서를 주었는데, 성서를 인정하고 성서에 나온대로 했다고 해서 폭스만 갇혔다.'
감옥에 갇힌 사람은 폭스만이 아니었습니다. 질서를 어지럽히고 미혹한다하여 수많은 친우회원들이 감옥에 갇혔습니다. 1664년에, 국교 모임을 제외하고는 다섯 사람 이상 모이는 종교 모임을 금하고 선서를 거부하는 사람은 처벌하라는 비밀집회법(Conventicle Act)이 제정되었습니다. 그러나, 친우회원들은 드러내놓고 모이기를 주저하지 않았기 때문에 곤경이 더욱 가중되었습니다. 친우회원들이 투옥된 후 그 가정이 겪는 곤란 등 여러 현실적 어려움들이 이만 저만이 아니었던 것입니다. 폭스는 이런 현실을 극복할 뿐만 아니라, '하나님의 영광에 주의를 기울이고, 무질서하고 경솔하게 행하며 진리의 길에서 벗어난 사람들을 충고하고 권면하기 위해서' 전국에 흩어져 있는 친우회원들에게 월회(monthly meeting)의 조직을 제안하고 이끌었습니다. 이미 있던 사계회(quarterly meeting)로는 감당하기 어려울 만치 그 수가 늘어났으며, 곤란을 극복할 수 있을 만한 조직력도 필요했기 때문이었습니다. 이후, 폭스는 주의 일을 하는 것과 동시에 모임의 체계와 행정을 구축하는 데 주력하였습니다. 이 일은 폭스의 창의력과 지도력을 드러내 보여준 것이라 할 수 있겠습니다.
장기간의 여행과 투옥으로 폭스의 몸은 지칠 대로 지쳤습니다. 몸이 극도로 쇠약해져 급기야 눈과 귀가 멀기도 했습니다. 그러나, 이내 회복하고는 다시 진리를 전하고 친우들을 격려했습니다. 영국에서 핍박이 누그러지기 시작하자 이번에는 아메리카로 발길을 옮겼습니다. 오랜 항해 후에 남아메리카 북단의 여러 섬들을 거쳐 그 너른 북아메리카의 강과 들과 산을 누비며 친우들을 격려하고 진리를 전했습니다. 기회가 닿는 대로 그곳의 토착 주민들(인디언)과도 집회를 가졌습니다. 그럴 때면 추장을 비롯 부족 의회원과 주민들이 함께 참여하여 애정 어린 경청을 보였으며, 폭스의 말에 공감하였습니다. 그가 본국으로 돌아 간 것은 2년여 후의 일이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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