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종교 친우회의
신앙과 실천(Guide to Quakr Practice)
아워드 에치 브링튼(Howard H.Brington)
이 글은 신앙의 해설을 하기 위한것이 아니고, 퀘이커교리의 실천생활에 대한 지침서가 될수 있도록 해보려고 쓴 것입니다.
생활이란 물론 언제나 신앙의 바탕에서 이루어져야 하는 것이기 때문에 이 글을 읽는 이의 마음속에 언제나 뚜렷한 신앙의
원리는 간직하고 있어야합니다.
친우회의 신앙에는 크게 나누어서 두가지가 있습니다.
그 하나는 일반적으로 기독교도들의 생활의 바탕을 규범하는 공통적인 것이고, 둘째는 종교친우회의 독특한 종교적 생활을
의미하는 것입니다.
이 책자에서는 이 독특한 점에 대해서만 관심을 갖고 실천의 해설에 도움이 될 수 있는 부분만을 쓰기로 하겠습니다.
종교적인 모임으로서 친우회는 공식적으로 다른 기독교 교파에서 하듯이 권위 있는 교리에 대한 성전을 출판한 일은 없었습니다.
이러한 형식적인 것과 교리에 대한 무관심한 태도는 인위적인 어귀로서 진리를 정확히 표현할 수 없다고 믿는 신념에 연유한
것입니다. 이러한 진리는 이 세상에 태어난 생명 예수그리스도에 의해 비로소 구현되었고 또 인생속에서 생활을 통해 끊임없이
나타나고 있습니다. 교리에 대하여 이러한 태도를 가진다해도 친우의 모임은 기독교의 계시를 이룩했던 역사적 사실들의
중요성을 경시하거나, 또는 약200년간의 교회사를 통해서 여러가지 의의를 제기했던 사실을 과소평가 하지도 않습니다.
신약성서는 이러한 신앙해설 중에서 가장 중요하며, 신성한 진리의 표현으로서 모두다 존중하고 있습니다. 성서는 전체적
통일성을 가지고 이해하여야 할것이지, 부분적인 귀절을 따라 이해해서는 안 될 것입니다. 성서가 이 세상에 나오게한
게기를 이룩한 성령은 인간이 마음에 끊임없이 진리를 계시해 주고 있습니다. 성서의 전체적 의의를 파악하는것은 이러한
성령을 통해서만 가능합니다. 이러할 때에만 진리는 신앙과 실천에 대한 인도자가 될 것입니다.
관례에 따라 전래되는 친우회의 예배는 과학자들의 전형적 활동과 비슷한 점이 있습니다.
과학자들의 모임은 과학적 방법을 이해할 수 있는 자질이 있고, 그러한 방법을 이용하기를 원하는 사람만을 그들의 모임에
받아들이는 것입니다. 이러한 경우에 있어서 그 회원이 될 수 있느냐, 없느냐 하는 것을 판단하는 기준은 어떠한 실험을
통해 이루어진 결과가 아니고, 거기에 도달하기 위한 방법인 것입니다. 과학자들은 어느 사실에 관해서는 의견이 합치
되지 않을지 모르나, 그 방법에 있어서는 일치하지 않을 수는 없을 것입니다. 이와 같이 친우회에 있어서도 케이커 신앙의
방식에 다른 의사를 가진 이는 그로선이 도달하는 곳을 모를지라도 그를 멤버로서 받아 들일 것입니다. 그러나 모든 행동의
방향은 뚜렷한 신념에 의거하는 것입니다. 과학자들은 우주가 질서 정연한 것이며 혼미한 것이 아니고 동일한 결과를 자아낸다는
이론에 입각하고 있는 것입니다. 퀘이커 교리는 하나님을 중심으로한 영적 세계에 기초를 둔 신념 즉 인류가 받아 들일수
있는 내적진리에 근거를 두고 있는 것입니다.
과학자나 친우 회원은 다 같이 어떤 바탕이 될수 있는 신념없이 같은 방법으로 같은 결론을 얻으리라는 것을 기대하지는
않습니다. 과학자들이 과거 참구의 발견에서 얻은 과학적 기존 사실을 체계짓고 끊임없이 그 발전을 위해 힘을 쓰듯이,
친우회원들도 역시 과거부터 이어받은 종교적,사화적 원리를 인정하고, 그 이상의 어떠한 진리라도 받아들이기 때문에 늘
새로운 해석을 받아 들이고 있습니다.
종교적 교파에 대해서는 기왕에 시련을 거쳐 확립된 관습은 개인의 착실한 습성이 그러하듯 중요한
것입니다. 그렇다고해서 이러한 관습이 틀에 박혀 버림으로서 발전과 성장의 대상에서 도외시 되어서는 안될 것 입니다.
18세기의 미국의 친우회는 어느 특정한 문화 양식과매우 엄격한 율법을 가진 교파이었습니다. 이 기간에 친우회의 모임은
자라고 번성했습니다. 그러나 19세기 후반 특히 20세기에 들어서는 첫째로 분파의 동기가 되었었던 권위주의에 대한
반동의 결과로서 ,그리고 둘째로는 널리 퍼졌던 고등 교육의 영향을 받아 많은 사람들이 퀘이커 교리의 정신은 모든 관습과
주장에 대한 관용의 태도에 지나지 않는것이라고 생각하게 되었습니다. 18세기의 준엄한 율법이나, 20세기의 관용의
태도도 현세의 욕구를 충족시키지를 못했습니다. 뚜렷한 셩격을 지니고 있으면서도 새로운 진리를 마음을 터놓고 받아 들일려는
종교 단체는 외부의 풍습을 경원하거나 이어받은 습관에 아로새겨진 과거의 지혜를 무시하는 교파보다 우월한 위치에 서
있다고 할 수 있습니다. 적극적인 것은 항상 소극적인 것보다 우월한 것이며, 안정된 기반위에 있는 생활은 막연하고
무궤도한 생활보다 앞서는 것입니다. 둑을 만들어 강물을 흐르게 하면 일정한 방향없이, 평야를 흐르는 물보다 도도하게
흐르며 깊은 것입니다.
< 예배회 >
집회는 예배회와 사무회 두가지가 있습니다. 예배회는 하나님을 섬기기 위하여 일주일에 적어도 한번은 가져야합니다. 예배는
친우회원의 신앙생활의 중심이며 근본적인 것이며, 그 예배를 통해서만 모든 종교적,사회적 실천 과업이 우러 나옵니다.
지금 기술하려는 예배 형식은 발전의 과정을 겪지 않고 시초부터 답습해 오는 친우회의 모임의 유일한 방법입니다. 이
의식의 발단이 즉 퀘이커교의 발달이었습니다. 친우회의 예배형식은 이론에서 출발한것이 아니고 체험에서 이룩된 것입니다.
그 당시의 종교가 대부분 하늘에 멀리 계신 하나님과,
성서에 기록된 구세의 계획에 있다고 믿는 때에 초기의 친우회원들은 마음속에 신의 존재를 발견 했습니다. 그들도 당시의
거의 모든 신학설을 받아 들였고, 그들 자신의 해석을 내리고 했으나 단 한가지 중요한 요소를 인식했습니다.
그것은 다름아닌, 성서의 원천이 되는 하나님과의 직접적 영교를 말한 것입니다. 이러한 생명과 진리의 원천은 마음속의
빛 마음속의 크리스트 각자의 마음속의 빛 천국의 씨알 이라 부르는 것입니다. 이러한 교의는 요한복음과 요한의 편지,
또는 바울의 편지와 기독교 신비론자들의 저술 속에서 볼 수 있습니다. 그리고 17세기의 케이커 교도들은 그들이 직접
그 빛을 봄으로써 알고 있다고 믿고 있습니다. 이리하여 그들은 종교가 말이나, 교리, 혹은 의식에 의한 제도가 될수
없다고 믿게 되었던 것입니다. 종교는 즉 하나님과의 직접적 영교이며 갈릴리에서 말씀하셨던 예수 크리스트의 음성과 직접
말하는 것이었습니다. 이러한 빛은 하나님의 말씀이고 길이며 진리이고 또 생명이며 영원한 크리스트였습니다.
그래서 그 빛은 "그러한 세계로 들어오는 모든 사람을 비춰줍니다." 기독교 이전의 철학자와 비기독교인인
모하메트 교도들의 서적에도 이러한 빛의 작용을 인정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그것은 인간의 이성이나 양심과 혼동 될수
있는 것은 아니며, 인간의 이성으로서는 완전히 이해 할 수 없지만 그것은 모든 상대적 가치의 원천이 되는 절대적 가치임은
명확한 것입니다.
그러한 빛은 맨 처음에 혼미의 세계를 비치고 모든 사물을 보다 고귀한 상태로 이끌어 올리던 창조의 힘이기도 합니다.
그것은 또한 따스하고, 생기롭고, 영원히 인간에게 자만심과 욕망을 견제하며 신성한 하늘의 인도에 다르라고 호소하고
있는것입니다.
이 빛에는 세가지 요소가 있습니다.
첫째로 종교적 진리와 도덕적 가치를 깨달을 수 있는 힘이고, 둘째로 인간이 그러한 지식을 토대로 하여 행동할 힘을
주고, 셋째로 인간 상호간의 협동과 화목을 이룩할 힘을 줍니다. 또 빛은 진리의 근원으서 인간을 인도해 주며, 죄악과
결점을 자각하게 해주는 힘이 있습니다. 또 약한 자에게는 위대한 일을 할 수 있는 힘을 주기도 합니다. 또 벗들의
모임이 한 사람의 행동 같이 통일 될 수도 있게 합니다.
퀘이커의 문헌에 볼 수 있는 신과 결합된다 라는 어귀뒤에는 항상 "그리고 인간상호간에도"라는 말이
잇달아 나옵니다. 인간에는 인간 이상의 것이 있으며 그것을 통해 인간이 존재하는 이상의 어떤 경지에 도달 할 수 있다고
믿는 것은 퀘이커 교에 있어서 뿐만이 아니고, 기독교 신앙에 있어서도 기이한 것은 아닙니다.
퀘이커 교리에서 독특한 것은 기독교적 개념에서 벗어나지 않는 경험을 토대로 한 예배 형식입니다. 이 형식이란 장로교에
있어서의 설교 중심이나, 천주교의 제단 중심적인 것도 아니며, 인간의 마음속에서 신과 소통한 신성한 생명이 그 중심을
이루고 있는 것입니다. 집회는 침묵속에 약속된 시간에 이루어지며 교도들은 말없이 그 장소에 모입니다. 이러한 말없는
모임이기 때문에 모임에 늦게 참석하면 고요한 분위기를 흐리게 합니다. 예배는 교도들이 그 자리에 앉는때 부터 시작되는
것이며, 각자의 영혼이 하늘에 이르도록 다짐하며 자리에 앉습니다.
친우회에서는 예배자들이 해야 할 일에 관해서 법측을 제정 발표한한 적이 없습니다. 그것은 어떠한 특별한 지시가 "성령은
바람같이 마음이 향하는 곳으로 소리없이 분다"는 자유스런 마음을 구해한다고 벗들은 믿기 때문입니다. "내적인
존재에 유의하라"는 말로써 충분히 표현되었다고 생각됩니다. 열중하여 꾸준히 예배를 계속하면 필경 참다운 예배를
터득하게 될것입니다.
벗들은 외관적인 세례나 성찬같은 성전은 사용하지 않습니다. 그러한 성전들은 "외관적 상징"에 불과한
것이며, 벗들은 이러한 것들의 "내재하는 상징"만을 추구하고 있는 것입니다. 성전이 상징적 가치이상의
것이 있다고 믿는 이들에 대해서는 "전우"들은 신의 은총이 영혼의 내적 셰례와, 신과의 영교에서
얻을 수 잇는 것보다 더 형식적 표현에 불과한 의식에 내려진다고는 말하지 않습니다. 인생에 있어서 어떠한 사건도 그것이
"내적 은총 "의 형태의 표현이라면 성전이 될 수 있는 것입니다.
이러한 신념에서 "친우회원"들은 찬송을 부르거나, 예배중에 소리내어 기도를 드리지 않습니다. 그
까닭은 이러한 일들은 그것과 부합될만한 개인의 체험에서 울어 나오지 않는 말을 하는 결과가 될 가능성이 있기 때문입니다.
예배에 있어서는 말로 표현하던, 노래로 하던간에 직접 체험한 내적 상태가 표현된 것이라야 합니다. 미리 어떤 의식적인
표현을 준비하는 경우는 거의 없습니다.
예배드리는 사람이 침묵에 잠겨 있는동안 어떻게 하면 가장 만족스러운 예배를 드릴수 있는가 하는 것은 그가 당면하고
있는 문제와 자신의 심적 상태가 어떠한가에 의해서 좌우됩니다. 그는 때때로 자신이 무의식중에 어떠한 신비로운 심경에서
또 다른 세계로 이르는 것은 느낄수 있습니다. "머지의 구름"이란 책자의 저자가 말한바와 같이 여러가지
환상을 억누르려는것 보다는 그런것에 대해서는 오히려 무관심 하도록하는 편이 좋을 것입니다.
마음의 표현은 공상이나 사색의 바람에 스치듯 나부길지 모르나 깊은 명상은 동시에 예배나 기도속에 잠겨 있을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여하튼 마음을 진정시키는것이 가장 좋은 일입니다. 예배의 어느부분은 산에 오르는 대와 비유할 수 있으며, 또
일부는 꼭대기에서 내려다본 풍경에 비유할 수도 있습니다.
전자의 경우는 사람이 여러모로 활동적이며, 후자의 경우는 마음이 안정되여 빛이 사아의식의 수평선을 넘어 비치는 것입니다.
여기 자존하는 정신적 준비. 즉 예배의 보조수단은 예배에 있어서 비교적 자아의식을 발동할 수 있는 요소가 될수 있을
것입니다.
< 예배회의 준비 >
예배회가 만족스럽게 이루어지기 위해서는 예배전까지의 준비 여하에 달려 잇습니다. 특히, 예배회 직전의 준비에 있습니다.
그것은 어떠한 시간과 장소를 갖추기 위한 의식적 문제가 아니고 생활과 인간자체의 전체적 준비인 것입니다. 모든 시대의
신비론자들은 최선의 종교 체험에 필요한 것은 선량하며 도덕적인 산 경험이라고 말했습니다. 노여움, 증오, 참욕, 질투,
그리고 허식적인 신사 기질같은 것은 종교적 체험의 장해물입니다. 사람됨이란 때로는 금욕을 통한 자기수의 수련을 통하여
얻을 수 있는 것입니다. 그러나 인생이란 우리 인간의 저속한 욕망을 억제하며 선을 행하고져 하는 의욕을 붙들기 위한
의지를 단련하는 우연한 사건들을 대개 충분히 부여해 줄 수 하나의 과정입니다. 예배에 있어서는 지아목교에 도달할 수
있도록 마음을 집중시키는 힘이 필요합니다. 만일 지난 일주일간의 어떤 행위가 자기의 마음과 하나님의뜻 사이에 어떤
틈을 만들었다면 이런 틈을 메꿀 수 있는 의식적 노력이 필요합니다. 그리고 이러한 일은 단순히 인간만의 노력으로서는
이루어지기 힘듭니다.
집단 예배에 있어서는 각 개인의 준비가 무거운 비중을 차지합니다. 매일 일정한 시간동안 기도 예배 또는 묵상을 하는
일이 우리들의 영적생활을 풍부하게 만들어 줍니다.
또 규칙적으로 신앙적 문헌을 읽는 것도 역시 같은 효과를 누릴 수 있습니다. 또 몇몇 사람만이 때때로 모여서 같이
예배회의 준비를 위해 기도 드리면 예배회 전체에 좋은 영향을 끼칠 수도 있습니다.
일요일의 예배 직전의 시간은 예배 시간에 대한 준비 과정에서 가장 중요한 부분입니다. 적절한 서적을 조용히 읽으면
예배에 큰 도움이 될 것이며 일요일의 조간 신문 같은 것을 읽는 다른 일은 예배 준비를 위해서는 전혀 부적당한 것입니다.
주일학교에서 열렬히 토론하는 것은 마음의 진정을 깨뜨리기 때문에 마음의 안정을 되찾기 위하려면 상당한 시간도 소요되고
여러모로 부적당합니다. 따라서 공개 토론회나 주일학교 같은 일은 되도록 예배후로 미루어 두는 것이 좋습니다. 그렇게
함으로서 토론이 예배의 장해가 되지 않고, 도리어 예배회가 토론에 좋은 영향을 끼치게 되는 것입니다.
① 자기반성 - 이것이 가장 중요시 되는 이유는 예배하는 사람이 신과의 영교를 방해하는 일을 이 방법으로서 발견 할
수도 있기 대문입니다. 여기 말한 장애란 이기심이나 혹은 천한 욕망일수도 잇을 것이며, 단순히 일상생활에 사로잡혀있는
심적 상태 일수도 잇는 것입니다. 인간의 한계를 자각하고 있는 동안이 지속됨에 따라서 인간자신의 눈으로 보다는 오히려
신의 눈을 빌어 사물을 볼 수 있게 되는 것입니다.
이렇게 해서 "내적인 시야"가 넓어지며, 자신뿐 아니라 주위 사람들가지도 이러한 영향을 미치게 될것입니다.
② 회상 - 성경이나 경건한 신앙적 시의 귀절을 회상하는 일이나 그 뜻을 되풀이해 생각하는 일은 그 말들의 원천인
성령과의 교통에 있어서 불가결한 것임으로 그 말은 성령의 빛속에서만 생명력과 힘을 가지는 것입니다.
③ 명상 - 자신의 생애중의 사건, 예수의 생애와 그의 업적에 대한 여러가지 의의 관해서 생각하는 것입니다.
④ 기도- 우리가 가진 어휘를 구사하여 자기자신의 표현방식으로 참회와 감사의 뜻을 표현하는 것입니다. 이러한 기도는
단순한 기원이어서는 안되며, 상대망에서 울어나오는 빛속에 자신을 끌고 들어가려는 내적 욕망에서 벗어나 애인에게 말할때의
욕망과 공통되는 점이 있는 것입니다. 기도는 영광과 힘이 더해질수록 단조로와지며 드디어는 모든 사색의 복합성을 초월할
수 있게 되는 것입니다. 이렇게 함으로써 말없는 기도는 감정이 순화되어 하나님을 향해 먼저 나갑니다. 이러한 기도는
애써 오래 지속할 수 는 없습니다. 다만 고요히 기다리며 복종의 마음에 충만되므로써만 이루어 질수 있는 것입니다.
적극적 심경은 원하는대로 소극성으로 변합니다. 그러한 상태에서만 하나님이 가까이 임하셨음은 마음속에 지각할 수 있게
됩니다. 이러한 느낌이 뚜렷해 짐으로서 예배드리는 사람은 자기 의사가 전지전능의 하나님의 뜻과 조화됨을 느낄 수 있는
것입니다.
이러한 자기 반성, 회상, 기도등은 하나하나 뚜렷이 구별 할 수는 없으며 함게 이루어질수도 잇는 것입니다. 어떤 때에는
기도 드리는 사람의 심상의 변화가 이러한 상태로 적응 될수도 있으며 또 그렇지 못할 수도 있습니다. 예배드리는 사람이
다루어 가는 길은 반드시 이정표가 있는 길을 걷듯이 확연한 것만은 아닙니다. 그것은 예배에 있어서 의식과 초의식의
경계선을 방황하기 때문입니다. 이렇듯 의식적 준비행동은 신이 인간을 위해 이루어 놓으신 영역에 속하는 것이 아니고
인간이 신을 추앙하려는 뜻을 이루어 놓은 인간영역에 속하는 것입니다. 물론 그렇다고 해서 어느정도까지는 신을 찾지
않고서 신을 대해 볼 수는 없는 것입니다. 기도가 말이나 사상에 사로잡혀 있지 않게 될때 인간의 영역에서 벗어나 인간이
신의 말씀을 들을 수 있는 상태로 점차 변해 갑니다. 불안정하고 연속성이 없는 인간의 뜻은 보다 넓고 심오한 상태로
성의와 일체가 되고 평화롭게 느껴지는 것입니다. 그렇게 됨으로써 영혼은 신의 임하심을 흠뻑 느끼게 됩니다. 그리고
모든것은 빛과 힘에 뒤덮혀 쌓이게 되므로, 자기의사는 사라져 버리고 신의만이 남아있게 되는 것입니다. 이러한 체험은
인위적으로 얻을 수 있는 것은 아닙니다. 그리고 그것은 갑자기 예기치도 않을 순간에 얻게 될수도 있을뿐더러 아주 단순하며
자연적으로 얻을 수 있기 때문에 경시되기 쉽고 지나간 뒤에야 느껴지기도 합니다. 신은 불이나 지진같은 요란스러운것중에
임하시는 것이 결코 아니며, 고요한 소리안에 임하시는 법이다.
마치 크리스트가 팔레스타인에 임하셨을때 "이토톡 너의 옆에 있었는데 나를 알아보지 못했느냐?"고
물으신것처럼 모든 인간은 신의 임하심은 의식하지 못한채 신의 존재를 체험할 수도 있습니다. "친우"들의
자서전에는 많은 사람들이 신이 저 멀리 살아지고 예배 자체도 아무런 소득없는 의식에 지나지 않는다고 생각되는 매마른
시기를 맛보았노라고 기록되어 있습니다.-물론 이러한 시기에 실망을 해서는 안되는 것이지만- 가뭄 뒤에는 종래 시원한
비가 내리기 마련입니다.
그러한 시기가 지난 뒤에는 극히 소수의 생명만이 자랄것입니다만 성장이 느린만큼 그 생명도 또 길것입니다. "친우들은
예배를 통해 한 점에 집중한다"고 말합니다. 그것은 즉 인생의 근본적 의의를 찾아 낼 수 있는 심오한 일점에
대하여 관심을 집중 시킨다는 말입니다. 이렇게 되면 개개인의 예배를 그가 열망하는 것에 쏠리는 것이 아니고 한없이
넓혀진 더욱 큰 생명전체와 유기적 관련성을 가지게 됨으로서 그 자신이 변하는 것같이 어떤 일면에 대한 전문적 지식을
가진 사람들에게는 특히 중요합니다. 왜냐하면 그런 분들은 다만 전문적이고, 분석적인 마음의 분야에만 관심을 기울이기
때문입니다. 이러한 선입감 때문에 그들은 그의 생명이 깊히 뿌리 박힌 영적 비탈위에 그가 생존한다는 사실을 자칫하면
잊기 쉽기 때문입니다. 그러한 사람들은 책이나 설교 혹은 강연등으로 얻을 수 없는 것을 침묵속에 드리는 예배에서 얻을
수 있기 때문입니다.
각 대학 내에 이러한 벗의 모임을 통해 학과에서 얻을 수 없는 것을 얻으려는 움직임이 이룩해졌다는 사실은 결코 우연한
일이 아닐 것입니다.
예배가 있은 뒤에는 반드시 행동이 따릅니다. "친우회"의 역사는 예배의 힘으로서 이 세상을 보다
낮게 만들어 보려는 실천의 계속이었습니다. 그것은 신의 이름으로 행동하기 위해 신을 찾는 것이 아니기 때입니다. 그러나
우리의 이성이 계시를 받아 우리의 양심이 밝아 짐으로써, 우리의 뜻이 올바른 길로 향하게 되면 우리는 신과같이 있음을
깨닫게 됩니다. 이 세상에서 우리로 하여금 속세를 벗어나게 고답적인 입장으로 이끌어 주는 경험은 동시에 우리를 속세로
환원시키는 경험이기도 합니다. 그 이유는 신이 우리에게 주시는 즐거움을 남에게 줌으로서 비로소 느끼게 되기 때문입니다.
예배 드리는 사람은 그가 영원한 존재이며 동시에 한정된 생명이라는것을 알며 또 하늘나라의 것이며 지상의 것이기도 하다는
것을 알게 됩니다. 영원 불멸하다는 것을 깨닫는 것은 그에게 내적평화와 안정을 자아내게 해 주지만 두가지 상태의 상이점이
아무런 심적 상태의 변화없이 느낄 수 있게 됩니다.
여기서 에배하는 사람은 이 지상의 세계가 더욱 더 하늘나라와 가까워질 수 있도록 이 세상의 무엇인가를 개혁하지 않으면
안된다고 느끼게 됩니다.
이러한 일을 하기 위해서는 그의 힘이 자라는데까지 하늘나라의 일원으로서 노력해야 합니다. 이러한 인식과 사고방식에
의해서 "친우�"의 사회적 활동이 이루어지는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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